40년 가까이 장애인예술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요즘처럼 장애인연극이 주목을 받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뭔가 작은 이정표라도 찍어놓고 싶은 심정이다. 연극을 다른 예술 장르와 구분 짓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배우, 관객, 그리고 그들이 만나는 공간이다. 배우와 관객이 같은 공간에 모여 있지 않다면 그것은 연극이 아니다. 하여 연극에서는 ‘누가 무대에 서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한국 연극사 100년 동안 무대에 오른 그 ‘누가’에 장애인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이 주체가 되는 연극 활동으로 일반 관객들을 모이게 한 공연은 2019년 두산아트센터에서 이연주 연출로 장애인극단 ‘애인’ 배우들이 출연한 <인정투쟁; 예술가 편>이었다. 모든 배우들이 장애배우인 이 작품은 ‘배우들의 예술가로서의 존재 의미는 배우 각자의 개성과 몸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평을 받으며 장애인연극에 대한 담론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연극이나 영화, 드라마 등에서 장애인 역할을 비장애인이 하는 것에 대하여 장애인계에서 꾸준히 문제를 제기했었다. 비장애 배우들의 크리핑 업(cripping up) 즉, 배우가 장애를 흉내 내며 연기하는 행위로 인해 발생했던 부정확한 재현, 고정관념의 재생산, 그리고 장애배우들의 기회 박탈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어센틱 캐스팅(Authentic Casting)은 2022년 tvN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드라마 후반부에 한지민이 비밀로 숨겨오던 쌍둥이 언니로 다운증후군 정은혜 배우가 등장하여 제주도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주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역할로 16부작에서 단 3회 출연하였지만, 그 파급력은 대단하였다.
영화나 드라마는 촬영하여 편집을 할 수 있지만, 연극은 배우와 관객이 동일한 시공간을 공유하는 예술이다. 장애를 가진 몸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무대 위의 배우는 일방적으로 관찰당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능동적으로 발화하는 주체다. 바로 그런 현존성 때문에 연극 <젤리피쉬> 이전에는 발달장애인 배우가 주인공이 되어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시도를 하지 못했다.
2023년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모두예술극장을 개관하였고, 기획공연으로 연극 <젤리피쉬>를 제작하여 2025년 3월 관객을 만났다. 다운증후군 여성의 사랑과 결혼이란 평범해야 할 삶이 금기처럼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사랑을 완성시켜가는 서사의 연극 <젤리피쉬>의 주인공을 다운증후군 여성 백지윤 배우로 캐스팅하였다.
그리고 프롬프터를 무대 위 등장인물로 드러내는 연출을 통해 발달장애 배우에 대한 지원과 조력을 숨기지 않고, 연극적 장치로 전환하여 차별성을 보여줬다. 이 과정에서 긴 연습 기간과 세심한 접근이 필요했으며 이런 과정을 통해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모두의 공연’ 제작 사례를 만든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젤리피쉬>가 2026년 1월 제62회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수상한데 이어 5월 제62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백상연극상을 수상하여 양대 연극상을 거머쥐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을까? 연극 전문가들이 <젤리피쉬>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발달장애로 인한 배우의 신체성이 장애가 아닌 새로운 미학으로 인식되었고 관객들도 무대 자체의 현존성을 수용하였다. 반드시 무대 위의 배우는 연기를 잘해서 관객의 몰입도를 높여주어야 좋은 연극이 아니라 배우의 신체성 즉 장애 몸에서 뿜어나오는 열정을 아름답게 보기 시작한 것이다.
앤드류 델방코(Andrew Delbanco)는 예술 내러티브의 두 가지 목표는 첫째, 소망을 주어야 하고, 둘째, 사회를 응집시켜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 두 가지 역할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예술이 바로 장애인예술이다.
장애인예술의 이런 장점이 가장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장애인연극을 비롯한 장애인공연예술이다. 연극 <젤리피쉬>의 성공을 발판으로 공연예술에 대한 체계적인 기획과 투자로 좋은 작품을 개발하여 ‘누가 무대에 서는가'를 보여주면서 아름다운 소망의 사회적 응집력을 만들어가고 싶다.
방귀희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