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게임사들이 새로운 먹거리로 로봇 시장을 점찍었다. 게임사가 오랫동안 쌓아온 그래픽 기술과 가상 공간 운영 노하우가 로봇 구동에 필요한 ‘피지컬 AI’ 개발에 활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국내 게임사들은 그래픽 기술이 도약적으로 발전한 2010년대 이후 다양한 3차원(3D) 게임을 꾸준히 운영하며 공간 인식·캐릭터 행동 구현 기술을 다져왔다. 배틀그라운드, 아이온, 검은사막과 같은 ‘대작’을 개발해온 국내 기업 역량은 해외 대형 게임 기업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이 기술과 노하우가 현실을 인식하고 움직이는 로봇 개발과 맞닿아 있다는 평가다.
◆피지컬 AI 기술에 적용되는 게임기술
여러 소프트웨어 기업 중에서 유독 게임사가 피지컬 AI와 관련이 깊은 이유는 게임의 특성 때문이다. 게임은 실제와 최대한 비슷한 모양의 가상세계를 구현해야 한다. 2000년대 초반 3D 그래픽이 나온 이래로, 게임사들은 실제 세상처럼 인식될 만한 환경을 구현하는 기술 개발에 힘썼다. 피지컬 AI는 가상 환경에서 구현한 데이터를 로봇·무인체계로 옮기는 체계다. 피지컬 AI에 사용할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선 가상공간에서 미리 학습하며 데이터를 쌓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 지점에서 가상공간 개발에 신경써 온 게임사의 역량이 빛을 발한다. 게임사 기반의 AI 기업들은 정교한 시뮬레이션 환경을 확보하고 있다. 가상 환경에서 반복 학습이 가능한 점도 강점으로 꼽힌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현실과 점점 흡사해지고 있는 게임 속 가상 환경은 로봇들을 효과적으로 훈련시킬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게임 개발자들이 매일 다루는 ‘언리얼 엔진’, ‘유니티’ 같은 게임 개발 도구는 최근 AI 훈련에 적극 쓰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테슬라는 완전자율주행(FSD) 기술을 개발·검증하는 과정에서 에픽게임즈의 언리얼 엔진을 활용해 실제 도로 환경을 사실적으로 구현한 가상 시뮬레이터를 구축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도 언리얼 엔진을 자율 비행 드론 AI 연구에 활용했다. 유니티 역시 제조 자동화를 겨냥한 피지컬 AI 솔루션을 선보였다. 개발사들이 사용하는 유니티 엔진을 활용해 제조사들이 가상 환경에서 실험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일례로 실리콘밸리의 AI 스타트업 스탠더드AI는 유니티 엔진으로 구성한 가상 환경에서 무인 결제 시스템을 훈련시켰다.
피지컬 AI 사업 선두로 치고 나온 크래프톤의 대표 게임 배틀그라운드는 100명의 이용자가 동시에 투입되는 가상 전장에서 지형·날씨·물리 법칙이 적용된 환경을 실시간으로 운영해온 게임이다. 수년간 전 세계 수억 명의 이용자로부터 축적된 전투 상황 데이터는 방산 분야의 ‘디지털 트윈’에 활용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올해 초 미국에 ‘루도 로보틱스’를 세우고 로봇 AI 분야에 본격 진출했다. 루도 로보틱스는 미국 소재 본사 CEO에 김창한 크래프톤 대표를, 한국지사 대표에 이강욱 최고AI책임자(CAIO)를 선임하고 휴머노이드 로봇 AI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단순히 피지컬 AI 기술을 개발하는 것을 넘어 보스턴 다이내믹스와 레인보우로보틱스처럼 완성된 휴머노이드 로봇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와 별개로 크래프톤은 지난 3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피지컬 AI 합작법인(JV) 설립에 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양사가 함께 피지컬 AI 기술을 연구개발하고, 실증 및 적용 시나리오를 검토해 실제 운영 체계까지 단계적으로 만들어 간다는 게 골자다. 이번 MOU를 통해 두 회사가 게임에서 축적한 인공지능(AI)과 시뮬레이션 기술을 방위산업에 접목해 ‘한국판 안두릴’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실제 지형과 물리 법칙이 반영된 가상 전장 시뮬레이터를 구축해 신병 훈련은 물론, 새로운 전술을 수천 번 반복하거나 한화의 무기 체계 성능을 가상 공간에서 먼저 검증하는 데 쓰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엔씨는 지난해 AI 연구개발 조직을 자회사 NC AI로 분사했다. NC AI는 생성형 AI ‘바르코’와 여러 형태의 데이터를 입력받아 처리하는 ‘멀티모달’ AI모델 ‘배키’를 선보였다. 이를 기반으로 올해 초 삼성SDS와 포스코DX, 롯데이노베이트와 컨소시엄을 구성, 정보통신기획평가원이 주관하는 월드 파운데이션 모델 기술개발 과제에 참가했다. 월드 파운데이션 모델은 실제 세계의 물리법칙과 환경 변화를 구현한 가상 세계에서 로봇이 행동을 통해 학습 데이터를 구축하는 기술이다. 국내 제조업체와도 적극 손잡기로 했다. 지난달 국방과학연구소(ADD)가 발주한 국방용 로봇 체계 개발 과제에 현대로템과 함께 참여해 최종 사업자로 선정됐다. 이달에는 한화오션의 상선·특수선 조선 현장에 자율 용접 로봇 모델을 개발해 납품하기로 했다. NC AI는 정해진 궤적을 단순 반복하는 기존 자동화의 한계를 넘어, 로봇이 용접 부위를 스스로 인식하고 판단해 용접을 수행하는 ‘자율용접 피지컬 AI 솔루션’ 구현을 목표로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