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반점·기괴한 촉수… 가까이 하면 너무 낯선 식물 [신리사의 사랑으로 물든 미술]

함수지 개인전 ‘어쩌면 환상통’

확대된 식물 단면·형태 한지에 스며내
촉수·가시 등 긴장·해방감 동시 생겨
인간의 신체와 닮은 이미지로 확장도

6폭의 족자로 이루어진 ‘염증의 바깥’
상처 아물어가는 과정 시각화해 눈길
“치열한 생존 과정 어루만지겠단 의지”

식물은 말이 없다. 조용히 자라나 꽃을 피우고 지며, 묵묵히 사계절을 산다. 성장을 위한 치열한 투쟁은 한쪽으로 기운 줄기나 꽃가루를 분주히 실어 나른 결실로 고요하게 드러날 뿐이다. 계절의 숨을 들이쉬며 못내 터져 나온 열매, 그 결실의 무게를 끝내 놓아 떨어뜨리고 몸을 움츠리며 다음 봄을 기약하기까지. 식물은 부단히 반응하고 행동한다. 말하지 않지만 가장 맹렬하게 순간을 살아낸다.

◆식물과 신체



옥인동 ‘스몰 벗 그레이트(Small but great)’에서 진행되는 함수지 개인전 ‘어쩌면 환상통’(2026. 5. 22.∼6. 14.) 또한 침묵의 현장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확대된 식물의 단면이나 현실과 환상 사이에 존재하는 듯한 식물의 형태를 한지에 스며낸다. 식물 형상에 집중하게 된 것은 식물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한 이후부터다. 부드러워 보이는 외형과 달리 날카로운 식물에 대한 촉각적 경험은, 가까운 타인의 말에서 상처받았던 기억과 겹쳐지며 식물과 인간의 신체를 동시에 닮은 이미지로 확장되었다.

전시 전경. (c)김진호. 함수지 작가 제공

흥미로운 점은 함수지가 식물을 단순히 인간의 감정을 투영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식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신체적 고통을 마주하는 태도와 닮아 있다고 느낀다. 낯선 식물의 이름을 굳이 알고 싶어 하기보다 낯선 채로 두고 싶어 하는 마음은, 모호한 감정을 섣불리 규정하거나 해석하려 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함수지의 형상들은 이상화되거나 낭만화된 식물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붉게 피어오른 반점과 가느다란 털, 뼈를 닮은 하얗고 단단한 구조와 흩날리는 촉수의 결합 등 낯설고 기이한 존재들은 작가의 말을 빌려 어딘가 ‘요괴’ 같은 모습이다.

식물과 인체, 상처와 생장의 경계를 오가는 이들은 하나의 의미로 정의되지 않는다. 함수지는 그 정체를 밝혀내려는 대신 낯선 채로 두고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이러한 관조적 태도를 그는 “성의 있는 무심함”이라 부른다. 그것은 방치가 아니라, 대상을 완벽히 파헤쳐내겠다는 오만을 내려놓고 그것이 지닌 신비와 복합성을 존중하겠다는 겸손한 유보에 가깝다.

‘그 몸은 성실하고도 유연하게 파괴되고’, 2025, 장지에 분채, 호분, 색연필, 73x91㎝. (c)박지영. 함수지 작가 제공

◆채우고 비워내기

고정된 정체성을 거부하는 화면 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에너지의 방향성이다. 촉수와 같은 형상들은 중심에서 밖으로 뻗어 나가는 듯하면서, 동시에 밖에서 안으로 수렴되는 것 같기도 하다. 부드러운 털과 뾰족한 가시, 응어리진 덩어리와 풀려나는 선 등 상반되는 힘들이 화면에 공존하며 긴장감과 해방감을 동시에 발생시킨다.

전시의 모티프인 ‘환상통’에서도 이러한 양가성이 감지된다. 절단된 신체 부위에서 여전히 고통이 느껴지는 이 현상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감각을 사유하게 한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몸 안에서 펄떡이는 장기를 직접 볼 수 없다. 이미지나 상상을 통해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음에도 감각은 통렬하게 존재한다. ‘허상’과도 같은 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태 속에서, 고통은 오히려 더욱 선명한 실재로 다가온다.

함수지는 이러한 역설을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마주하기를 택한다. ‘어쩌면’ 환상일지도, 실재일지도 모르는 그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숨길 수 없다면 차라리 “장식해서 내보이는 정성이라도 들여야겠다”고 한다. 손은 분주하지만 말은 없다. 작가는 그저 모호한 상태가 새로운 가능성으로 풀려나갈 수 있도록 화면을 구조화한다. 이러한 ‘침묵’의 태도는 소극적 상태가 아니라, 발화를 지연함으로써 대상을 섣불리 단정 짓지 않겠다는 주체적인 선택이다.

침묵은 채우고 비우는 행위로도 실천된다. 그는 한지에 색채를 켜켜이 쌓거나 반대로 일부 공간을 과감하게 비워낸다. 이때, 여백은 결핍이 아니라 감각의 밀도를 조율하는 조형적 장치가 된다. 동시에 다시 무언가를 채우고 싶어질 때를 기다리며 한 발짝 물러서는 작가의 신중한 태도를 은유하기도 한다. 숨을 들이마시고 뱉어내며 생명을 유지시키는 호흡처럼, 함수지의 작업에서 침묵과 비움은 자기 보존을 위한 삶의 리듬과도 같다.

‘무른 집’, 2026, 장지에 분채, 호분, 195x84㎝. (c)박지영. 함수지 작가 제공

◆상처를 딛고

6폭의 족자로 이루어진 ‘염증의 바깥’은 일련의 시간에 따라 염증이 맺히고, 터지고, 아물어가는 과정을 시각화한다. ‘안’이 아닌 ‘바깥’을 그린 이유는, 내부(원인)을 파고들기보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현된 치열한 생존 과정을 어루만지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열매처럼 터져 나온 ‘아픔의 결실’들은 이내 다가올 회복의 궤도로 진입하기를 기다린다.

염증이 칠흑같이 피어난 절정의 순간은 ‘새검은 결실’에서도 목격된다. 검은 덩어리들이 곧 떨어져 내릴 듯 영글어 있다. 작가는 가장 고통스러운 동시에 치유로 향하는 첫 순간을 가까이 응시한다. 상처와 회복의 시간이 하나의 몸 안에서 겹쳐진다. 검은 열매는 우수수 떨어지고 곧 새로운 몸으로 거듭날 것이다. 상처를 통과해 낸 몸은 필연적으로 전과 다른 밀도를 지닐 수밖에 없다.

회복의 원리는 단순하지만 태초부터 생명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몸속에 새겨 넣은 유구하고 경이로운 생존 방식이다. 함수지의 화면이 원초적이면서도 미래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인간보다 오래 살아남은 감각의 구조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제시하기보다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질문한다. 치유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상처를 안은 채 계속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고통의 흔적을 제 몸에 나이테처럼 새겨 넣은 유기체들은 스스로의 생을 계속해서 집요하게 이어 나간다.

◆씨앗이 되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곁에 두며 성의 있게 돌보는 함수지의 작업은, 존재에 대한 비폭력적 응시가 어떻게 삶의 방식으로 안착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가 택한 침묵과 비움, 멈춤과 기다림은 끝내 명명되지 않은 감정들이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음을 증언한다. 발화되지 못하거나 채워지지 못한 마음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씨앗이 되어, 언젠가 적절한 때를 만나 발아하기를 기다린다.

존재를 붙잡기보다 스스로 다른 형상으로 변화할 시간을 허락하는 태도 속에서, 고통은 제거의 대상이 아닌 생장의 시작이 된다. 피할 수 없다면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성실하게 찾아내겠다는 듯. 염증의 흔적은 끝내 꽃처럼 피어난다.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