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만년 전 화산 폭발이 만든 비둘기낭 폭포
사계절 내내 영롱한 청록빛 잃지 않아
Y자형 출렁다리 오르면 한타강 협곡 ‘아찔’
겸재 붓끝 머문 화적연 볼수록 ‘신기’
울창한 숲이 하늘을 가린 나무 계단을 걷는다. 수직으로 깎아지른 현무암 절벽의 절경을 즐기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햇빛은 멀어지고 세상의 소음도 점점 희미해지니 어둠과 고요만 남는다. 그때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에메랄드빛 작은 소(沼). 햇살이 겨우 비집고 들어와 물 위로 떨어져 영롱하게 빛나는 비둘기낭폭포 앞에 서자 인간의 손길 닿지 않은 태고의 신비가 온몸을 감싼다.
◆스크린이 사랑한 비둘기낭폭포
경기 포천시 비둘기낭폭포의 역사는 약 5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 평강군 부근에서 수차례에 걸쳐 강력한 화산 폭발이 일어났고, 분출된 용암이 옛 한탄강의 물길을 따라 철원, 포천, 연천까지 흘러내려 거대한 용암대지를 형성했다. 그때 상부는 표면이 빠르게 굳으며 4~8각형 기둥 모양으로 갈라진 주상절리가 수직으로 발달했다. 또 하부는 가로 방향으로 얇게 쪼개진 판상절리가 자리를 잡으면서 수직과 수평의 기하학적 암석구조가 서로 맞물리는 독보적인 절벽의 얼굴이 완성됐다. 여기에 수십만 년 동안 흐른 강물이 현무암의 약한 틈을 끊임없이 파고드는 침식작용이 더해지면서 만들어진 작품이 비둘기낭폭포다. 절벽 안쪽이 주머니처럼 둥글게 파인 하식동굴로, 15m 높이의 절벽이 사방을 감싸 햇빛을 차단하기 때문에 폭포 아래 웅덩이는 사계절 내내 영롱한 청록빛을 잃지 않는다. 그 빛깔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처음 이곳을 마주한 이들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만다. 이런 지질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비둘기낭폭포는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의 핵심 명소로 지정됐다.
비둘기낭폭포 입구로 들어서면 한반도 지도를 배경으로 새 둥지 모양으로 만든 조형물이 여행자를 반긴다. ‘낭’은 주머니를 뜻하는 우리말. 폭포 뒤쪽 현무암 절벽이 주머니처럼 둥글게 파인 동굴이고, 예전에 아늑한 동굴 안쪽 바위 틈새에 수많은 멧비둘기들이 둥지를 틀고 살았기 때문에 비둘기낭이란 이름을 얻었다. 꽃잔디 예쁘게 핀 정원을 지나 계단을 끝까지 내려서면 현무암 협곡이 품은 아름다운 비둘기낭폭포가 절경을 드러낸다. 빛은 어둠 속에서 더 빛난다고 했던가. 어둡지만 그래서 청록빛 소는 더 맑게 빛나며 신비로움을 더한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비둘기낭에서 한탄강 쪽으로 이어지는 현무암 협곡도 보이는데, 마구 쌓인 기암괴석 돌덩이들은 마치 외계 행성에 불시착한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이름이 폭포이지만 폭포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 비둘기낭은 연중 세차게 쏟아지는 일반적인 폭포가 아니다. 한탄강 주류가 아니라 주변의 작은 지류가 유입되는 곳이라 여름철 집중호우로 비가 많이 내려 상류의 계곡물이 넘쳐흐를 때 비로소 반짝이는 서늘한 폭포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평소에는 에메랄드 소를 품은 채 침묵을 지킬 뿐이다.
스크린도 이 비밀스러운 공간에 매료됐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독화살을 맞고 치명상을 입은 천명공주(박예진 분)가 추격자들을 피해 급히 숨어든 비극적인 은신처로 등장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에서는 사계절 내내 얼음이 얼고 안개가 자욱한 미스터리한 골짜기 ‘언골’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의녀 서비(배두나 분)가 죽은 자를 되살리는 비밀의 꽃 ‘생사초’를 처음 발견하며 거대한 비극의 서막을 알리는 장면 등이 촬영됐다. 또 드라마 ‘추노’에서는 도망길에 오른 태하(오지호 분)와 혜원(이다해 분)이 잠시 숨을 돌리며 서로의 깊은 상처와 마음을 확인하던 애틋한 휴식처로 그려졌다.
◆하늘 위에서 협곡 품는 Y자형 출렁다리
비둘기낭폭포의 아늑하고 비밀스러운 품에서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서면 요즘 포천의 핫플레이스로 인기 높은 한탄강 Y자형 출렁다리가 펼쳐진다. 2024년 9월 개통된 다리는 총 길이 410m로 국내에서 가장 긴 Y자형 출렁다리다. 한탄강 협곡으로 단절된 비둘기낭폭포 구역, 가람누리 전망대, 생태경관단지를 세 방향으로 연결해 포천의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비둘기낭 입구에서 다리까지 연결되는 산책로가 조성됐고 편도 20분 정도 걸린다.
지상 30~50m 높이에 설치된 다리 위에 올라서면 수십만 년의 세월이 빚어낸 현무암 주상절리 절벽과 그 아래 굽이치는 한탄강 물줄기가 발아래로 아찔하게 펼쳐진다. 다리 바닥은 격자형으로 꾸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덜덜 떨린다. 전국의 많은 출렁다리를 가봤지만 이렇게 심하게 흔들리는 다리는 처음이다. 특히 좌우로 요동쳐서 멀미가 날 정도다. 이유가 있다. 세 갈래 다리 모두 하부를 받치는 교각이 전혀 없는 ‘무교각 주탑 현수교’ 공법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 갈래 끝에서 잡아당기는 힘만으로 공중에 떠 있는 상태라 다른 출렁다리보다 훨씬 출렁거린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성인 약 2500명이 동시에 올라가도 견딜 만큼 탄탄한 내진·내풍 설계를 갖췄기 때문이다.
비둘기낭폭포 쪽 출렁다리는 나선형으로 걸어 오르는 가람누리 전망대로 연결된다. 정상에 올라서자 현무암 협곡과 강 위로 놓인 Y자형 출렁다리의 형태가 아주 또렷해 간담이 서늘하다.
다리를 건너면 26만㎡에 달하는 광활한 한탄강 생태경관단지와 바로 이어진다. 봄이면 보랏빛 알리움 정원과 이국적인 루피너스 꽃밭이 출렁다리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특정 축제 기간에는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야간 개장도 운영한다. 출렁다리 입장료는 6000원이지만 3000원짜리 포천사랑상품권으로 환급해 주며 푸드트럭, 카페, 음식점에서 사용할 수 있다.
비둘기낭폭포 인근 협곡에는 Y자형 출렁다리보다 한탄강 ‘공중 산책’의 시대를 먼저 연 선구자, 한탄강 하늘다리가 놓여 있다. 총 길이 200m, 폭 2m 규모의 보행자 전용 교량으로, 강바닥에서 50m 위 허공에 아찔하게 매달려 있다. 1500명이 동시에 통행해도 끄떡없는 견고한 구조이지만,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미세한 흔들림이 협곡의 대자연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한다. 이 다리의 백미는 중앙부 세 곳에 설치된 투명 강화유리 스카이워크 구간. 유리판 위에 발을 올리는 순간, 굽이치는 한탄강과 깎아지른 주상절리 절벽이 발아래에 그대로 드러난다.
◆겸재 붓끝 머문 자리, 화적연
한탄강을 따라 차로 20분을 거슬러 올라가면, 강물이 크게 ‘S자’로 굽이치는 곡류 구간에 높이 약 13m로 우뚝 솟은 기묘한 바위 화적연(禾積淵)을 만난다. 볏짚단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모양을 닮아 ‘볏가리소’로 불린 바위는 볼수록 아주 신기하게 생겼다. 강가 쪽을 향해 길게 솟은 바위는 고개를 빼고 기어가는 달팽이의 머리를 닮았고, 동글동글하게 말려 올라간 바위의 등 부분은 달팽이집처럼 보인다. 머리를 치켜들고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누에나 애벌레의 머리를 닮은 것도 같다. 조선시대 문신 박세당은 ‘서계집’에서 “윗부분은 마치 용의 머리처럼 두 개의 뿔을 이고 있고 아랫부분은 거북(龜) 같다”고 묘사하며 ‘귀룡연(龜龍淵)’이라 표현했다.
기묘한 생김새 때문에 화적연은 조선시대에 기우제 터로 사용됐다. 왕실과 조정 주도의 국가적 기우제는 가뭄의 심각성에 따라 1~12제차로 나눠 장소를 옮겼는데, 화적연은 가장 마지막 단계에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한강 이북 권역에서는 개성의 박연폭포와 함께 단 두 곳만 지정됐을 정도로 신성시됐다. 조선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도 금강산 유람길에 이곳을 지나다 풍경에 반해 붓을 들었고, 그림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해악전신첩’ 속에 살아 숨 쉰다. 면암 최익현 등 당대의 문인들도 이곳을 찾아 바위의 장엄함을 용과 거북에 비유하며 시와 글을 남겼다.
독특하고 신비로운 현무암 협곡과 기암괴석 지형 덕분에 화적연은 미스터리 스릴러나 시대극의 중요한 사건 발생지로 등장한다. 비무장지대(DMZ)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실종과 수색작전을 다룬 밀리터리 스릴러 드라마 ‘써치’에서 사건 현장 배경으로 쓰였고, 영화 ‘외계+인’에선 얼치기 도사 무륵(류준열 분)이 시간의 문을 여는 ‘신검’을 찾아 나서는 장면에서 밀본의 본거지 입구로 등장한다.
화적연은 사실 지질학적 종합선물세트다. 바위의 뿌리는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지하에서 굳은 화강암이며, 그 위로 약 50만년 전 분출한 신생대 현무암 용암이 덮였다. 이후 수십만 년에 걸친 한탄강의 침식작용으로 상부 현무암이 벗겨지며 그 아래 숨어 있던 밝은 빛깔의 화강암이 다시 지표면 위로 웅장하게 솟아올라 지금의 절경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