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웅의역사산책] 소설가 한용운을 아십니까

1935년 소설 ‘흑풍’서 일제강점기 현실 그려
혁명·여성해방 문제의식… 소설가 진가 드러내

매일신보는 1944년 7월1일 한용운(韓龍雲) 대사가 6월29일 뇌일혈로 쓰러져 경성부 성북정 자택에서 입적했다고 보도하였다. 그가 한국 불교계에 공헌했으며 조선불교유신회, 조선불교사 등을 창립하고 ‘불교대전’, ‘불교유신론’ 등의 저술을 남겼음을 덧붙였다. 다만 그가 문인으로서 ‘님의 침묵’을 비롯한 시집을 출간하고 여러 편의 소설을 연재했다는 사실은 누락되어 있다.

반면에 필자는 동년배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불교유신론과 불교개혁운동보다는 ‘님의 침묵’을 비롯한 그의 시를 학습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그런 가운데 독립운동가 한용운의 면모를 알게 되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라는 시구는 필자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연애의 감정으로도 읽을 수 있고 조국에 대한 사랑을 연상하는 게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있어 편했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또 그가 3·1운동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 보완하였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書)’를 지었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때 그는 자택 심우장(尋牛莊)을 북향으로 지었는데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일화도 들려왔다. 훗날 학생들과 도성 답사를 하는 가운데 심우장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필자가 소설가로서 한용운의 진면목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한용운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거니와 시인, 독립운동가, 불교개혁가라는 고정관념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런 점에서 그가 1935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흑풍(黑風)’을 비롯한 여러 소설은 필자에게는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하는 길동무였다.

그는 시인으로서 빼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1930년대 중반 왜 소설가로 변신했을까? 그의 소설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주려 했을까? 그는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전쟁 분위기를 돋우는 가운데 신간회를 비롯한 각종 민족·사회운동 단체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는 상황에서 시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껴야 했다. 시는 함축된 표현으로 가슴에 진한 감동을 남기지만 시시각각 조여오는 일제의 압박을 구체적으로 담아 독자들과 공유하면서 미래를 전망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시 현실을 직접적으로 꼬집기에는 일제의 검열과 통제가 만만치 않았다.

그런 점에서 청말 어느 혁명가의 삶과 애인의 거룩한 희생을 담은 소설 ‘흑풍’은 여러모로 일제의 매서운 감시에서 벗어나면서도 당시 혁명을 꿈꿀 수 있는 보육기(保育器, 인큐베이터)가 아니었을까?

특히 필자에게는 ‘흑풍’이라는 제목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흑색은 아무런 권력의 색으로도 물들지 않은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색깔로 아나키스트들이 즐겨 선호했던 색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의 교유관계를 조금만 뒤져보아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936년 초 뇌일혈로 쓰러져 사망한 아나키스트 신채호의 유해를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암장했다.

또 그는 지인들과 더불어 단재의 유고집 발간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소설 ‘흑풍’을 통해 민족문제와 함께 여성해방 등 사회 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1919년 3·1운동으로 서대문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썼던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첫 구절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는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구절이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