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이 앉아 있었다
(중략)
묵은 묵을 앙다물고
모서리에서 가장 깊고 먼 쪽으로 기어들었다
묵에 칼을 먹였을 때
묵은 칼에게 갓 썬 싱싱한 겉을 꺼내 보였다
(날렵하게 탱탱하게)
묵은 작아진 묵의
다시 깊고 먼 심부로 달렸다
(매끄럽게 재빠르게)
너는 피부뿐인 몸이야,
내가 말했다
나는 내면뿐인 육체야,
묵이 말했다
묵을 즐기는 이라면 벌써 시원한 육수에 얼음까지 동동 띄운 묵사발을 한 그릇쯤 맛보았을지 모르겠다. 도토리묵사발이나 메밀묵사발은 여름 별미라는데, 막상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메뉴는 아닌 것 같다. 나는 특별히 묵을 좋아하는 편도 싫어하는 편도 아니지만, 시를 읽으며 종일 묵 생각을 했다. 조만간 묵을 먹게 되려나. 그렇다면 식탁에 앉은 그 “피부뿐인 몸”을 두고 이 시를 떠올리겠구나. “나는 내면뿐인 육체야” 하는 묵의 말을 듣게도 되겠구나.
내가 본 묵은 언제나 무르고 약한 존재였다. 조금이라도 세게 쥐면 젓가락 사이에서 허망하게 으스러지곤 했다. 그러나 실은 그것이 내면뿐인 육체라면,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 결과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얼마나 긴 시간 스스로를 단련해 왔다는 것일까. 칼 앞에서도 날렵하게 탱탱하게, 매끄럽게 재빠르게. 으스러지고 또 으스러져도 다시 심부를 향해. 아, 나는 이제 묵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박소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