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속의 특정물질을 조절해 자폐증의 핵심 증상을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치료 전략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제시됐다.
기초과학연구원(이하 IBS) 시냅스 뇌질환 연구단 김은준 단장(KAIST 생명과학과 석좌교수) 연구팀은 뇌 내 특정 물질인 ‘글리신’을 조절하는 약물을 통해 자폐증 생쥐 모델의 행동 증상을 개선하고, 생쥐 모델과 인간 뇌 오가노이드(줄기세포 등을 배양해 만든 작은 장기유사체) 모두에서 신경 기능 회복 효과를 확인했다고 9일 밝혔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이하 자폐증)는 신경발달장애 중 하나로, 사회적 상호작용에 어려움을 겪거나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특징을 보인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에 따르면 미국 내 8세 아동 31명 중 1명(3.2%)이 자폐증을 가진 것으로 보고됐지만, 아직 명확한 발병 기전과 치료법은 밝혀지지 않았다.
김은준 단장 연구팀은 자폐증 발병 기전에 대한 대표적인 가설 중 하나인 ‘NMDA 수용체 기능 저하’에 주목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NMDA 수용체는 뇌 신경세포가 신호를 주고받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백질로, 기능이 저하될 경우 자폐증을 비롯해 조현병, 지능장애, 펠란-맥더미드 증후군(PMS) 등 다양한 뇌 신경 질환과 연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수용체는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탐산과 글리신이 함께 결합해야 활성화되기 때문에 주변 글리신 농도에 따라 활성이 달라질 수 있다.
연구팀은 이 점에 착안해 글리신의 양을 조절하면 약해진 NMDA 수용체 기능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기존 연구들은 GlyT1처럼 글리신을 옮기거나 회수하는 수송체 단백질을 표적으로 한 약물을 사용했지만, GlyT1 저해제는 임상 시험에서 효과가 제한적이었고, 호흡과 운동 조절에 중요한 뇌간에 GlyT1이 많이 존재해 부작용 우려가 있었다는 게 연구팀의 지적이다.
이에 연구팀은 GlyT1과 달리 대뇌 피질과 해마 등 인지 기능과 관련된 영역에 주로 존재하는 글리신 수송체 Slc6a20a를 새 표적으로 삼고 NMDA 수용체 기능이 저하된 자폐증 및 PMS 모델 생쥐의 뇌에 Slc6a20a를 억제하는 ASO(이하 Slc6a20a-ASO)를 주사했다.
그 결과 4주 후 생쥐의 NMDA 수용체 기능이 정상 수준으로 회복됐고, 다른 쥐와 어울리지 못하던 사회성 문제와 과도하게 털을 고르는 행동(그루밍)이 개선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특히 행동 개선 효과는 단 한 번의 주사 후 8주가 지난 뒤에도 관찰돼 장기간 효과가 지속된다는 것이 확인됐다. 또 뇌 신호가 오가는 연결 부위인 시냅스의 단백질 기능 조절 상태를 분석한 결과, 약물(Slc6a20a-ASO) 투여 후 개별 단백질 수준을 넘어 단백질 기능 전반이 정상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유전자 변이를 가진 인간 대뇌 피질 오가노이드를 제작해 실험한 결과 생쥐모델과 마찬가지로 NMDA 수용체 기능이 저하돼 있었으나 약물 처리 후 신경기능이 정상 수준으로 회복됨이 밝혀졌다.
이는 NMDA 수용체 기능이 자폐증의 발생과정과 치료전략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 발달과정이 지난 시점에서도 자폐증 관련 뇌 기능과 행동 증상이 개선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교신저자인 김 단장은 “이번 연구에서 글리신 조절 약물을 통해 자폐증 모델 생쥐의 행동 증상 개선과 생쥐 및 인간 대뇌 오가노이드의 신경 기능 회복 효과를 확인했다”며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핵심 증상을 겨냥한 치료제 개발의 기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지난달 29일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 온라인 판에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