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러시아 모스크바 법원은 궐석 재판에서 국제형사재판소(ICC) 카림 칸(56) 검사장의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지난 2023년 ICC가 칸 검사장의 청구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이 불법이란 이유를 들었다. 러시아 사법 당국이 칸 검사장의 신병을 확보할 수 없는 만큼 유죄 선고는 선언적 효력에 그쳤다. 하지만 러시아 같은 초강대국에 의해 ‘손봐줘야 할 사람’으로 찍힌 것 자체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푸틴은 물론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대한 ICC의 체포영장 발부도 주도했던 칸 검사장이 낙마 위기에 놓였다. 8일(현지시간) AP 통신에 따르면 ICC는 칸 검사장을 상대로 제기된 성 비위 의혹이 사실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의 직무 수행을 정지하는 한편 징계 절차에 회부키로 했다. 영국 국적 법률가인 칸 검사장은 지난 2021년 ICC 검사장으로 선출됐다.
외신 보도에 의하면 칸 검사장은 ICC 검찰국이 아닌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던 여성 직원을 자신의 사무실로 발령을 낸 뒤 해외 출장 등에 동행하며 부적절한 성적 접촉을 시도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해당 여직원의 문제 제기로 ICC 내부에서 조사가 시작된 뒤 이번에는 칸 검사장이 영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2009년에도 여성 인턴을 성추행했다는 제보가 접수됐다.
현재 칸 검사장 측은 무혐의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변호인단은 ICC에 제출한 서면에서 “어떤 위법 행위도 없었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유엔 산하 기관인 ICC는 한국 등 총 125개 나라가 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칸 검사장의 운명은 바로 이 ICC 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결정될 전망이다. 125개국 가운데 과반인 63개국 이상이 찬성하면 칸 검사장은 해임된다.
2023년 ICC 재판관들은 푸틴을 상대로 칸 검사장이 청구한 체포영장을 전격 발부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ICC에 따르면 2022년 2월 러시아군에 우크라이나 침략을 명령한 푸틴은 전쟁 범죄 혐의를 받고 있다. 칸 검사장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 내 자국 점령지의 어린이들을 강제로 러시아로 데려간 행위가 전쟁 범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체포영장 발부 후 푸틴은 ICC 협약 가입국 방문이 어려워지는 등 정상 외교 행보에 제약을 받고 있다.
칸 검사장은 이듬해인 2024년에는 네타냐후에 대해서도 체포영장을 청구해 ICC 재판관들의 허가를 받아냈다. 그는 2023년 10월 중동 가자 지구에서 발발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의 교전 도중 이스라엘군이 가자 지구 민간인들을 살해한 행위가 전쟁 범죄라는 논리를 폈다. 푸틴과 마찬가지로 네타냐후도 체포영장 때문에 해외 순방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황이다.
다만 네타냐후 체포영장은 이스라엘의 맹방인 미국의 분노를 샀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직후인 2025년 2월 미국은 칸 검사장이 “미국 및 이스라엘 안보를 위협한다”며 제재 대상자 명단에 올렸다.
칸 검사장은 1970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파키스탄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런던 킹스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그는 검사로 일하다가 1997년 옛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 검사로 부임하며 처음 국제 사법 기관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캄보디아·레바논 특별재판소 등에서 일하며 전쟁 범죄의 진상 규명과 심판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