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를 사 먹는 게 신기했던 산골 소년…‘초롱이’ 이영표가 증명한 헌신의 가치

새벽마다 산을 뛰던 축구소년
한국 축구의 전설이 되다

1977년 버스도 잘 다니지 않던 강원도 홍천의 산골 마을. 200가구 남짓한 그곳에서 자란 농부의 막내아들은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처음으로 고기를 먹어봤다.

 

그래도 소년은 자기가 가난한 줄 몰랐다. 초등학교 2학년, 처음 도시로 올라온 날 안양의 시장에서 사람들이 돈을 주고 채소를 사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놀랐다. 그의 마을에서 채소란 길러 먹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강원도 홍천 산골 마을에서 자란 어린 시절의 이영표를 AI로 구현한 이미지.

 

그 소년은 훗날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자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왼쪽 풀백 중 한 명이 된다. 이영표(49)의 이야기다.

 

안양초 축구부 시절, 꿈을 키워가던 이영표의 모습을 AI로 구현한 이미지

 

남들보다 잘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안양초등학교 4학년 때 체육 교사가 그의 달리기 실력을 눈여겨봤다.

 

“수업 끝나고 축구부로 와라.”

 

초등학교 3학년, 그는 경기도 단축마라톤에서 입상할 만큼 발이 빨랐다. 운동장에서는 누구도 그 아이를 따라잡지 못했다. 체육 교사가 먼저 가능성을 알아본 이유였다.

 

하지만 빠른 발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남들보다 잘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믿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

 

축구가 좋았고 더 잘하고 싶었다. 매일 줄넘기 2단 뛰기를 1000번씩 했고, 겨울이면 고깔을 세워두고 드리블 연습을 반복했다.

 

고등학생이 된 뒤에는 새벽 5시에 일어나 한 시간씩 산을 뛰었다. 대학 4학년까지 이어진 개인 훈련은 1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술과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축구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예 생각도 안 하는 친구”라고 기억한다. 건국대 시절 태릉선수촌 체력 테스트 결과를 본 정종덕 감독도 놀랐다.

 

“심폐 능력이 당장 마라톤 선수를 해도 될 정도였다.”

 

2014년 모교 건국대를 찾은 이영표. 건국대

 

왼쪽 윙백, 운명을 바꾸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영표는 왼쪽 윙백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안양중과 안양공고 시절 그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였다. 등 번호 10번을 달고 각종 대회 득점왕을 휩쓸었고, 1995년 KBS배 전국고교선수권 우승을 결정한 결승골도 그의 발끝에서 나왔다.

 

당시 그의 꿈은 단순했다. 골을 넣는 선수, 관중의 환호를 받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건국대에 입학한 뒤 정종덕 감독은 그를 왼쪽 윙백으로 내렸다. 주인공을 꿈꾸던 그에게는 작은 좌절이었다. 골과 가장 먼 자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축구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배웠다. 그는 훗날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11명이 경기할 때 결정적 역할은 2~3명이면 충분해요. 나머지 8명은 헌신해야죠. 능력자 1~2명이 있는 팀은 한 경기 정도는 이겨요. 그런데 시즌 전체 우승컵을 가져가는 팀은 헌신하는 선수들이 많은 팀이에요. 헌신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절대 못 이겨요. 저는 거기서 오는 기쁨이 크다는 걸 알았어요.”

 

그 깨달음은 월드컵 무대와 은퇴 후의 삶까지 관통하는 철학이 됐다.

 

2002 한일 월드컵 스페인전에서 호아킨 산체스를 마크하는 이영표.

 

꿈은 이루어졌고, 그곳에 이영표가 있었다

 

청소년 대표를 거치지 않은 그에게 태극마크는 늦게 찾아왔다. 대학 4학년 건국대 축구부에는 국가대표가 여섯 명이나 있었으나, 주장인 그는 끝내 그 안에 들지 못했다.

 

그해 겨울 홀로 운동장에 나와 훈련하다 눈물을 쏟았다. “노력해도 안 되는구나, 결국 될 놈만 되는구나” 싶었다.

 

그러나 2주 뒤 국가대표에 결원이 생겨 테스트 기회를 잡게 됐다. 그렇게 1999년 6월 코리아컵 멕시코전에서 A매치에 데뷔하며 ‘깜짝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관심은 자칫 자만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들뜬 기색을 보이던 그를 형이 호되게 나무랐고, 잠시 흔들렸던 그는 다시 축구화 끈을 졸라맸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거쳐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한복판에 선 것도 그런 노력의 결과였다. 그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대회 직전 종아리 근육이 12cm 파열되는 큰 부상으로 조별리그 1·2차전을 뛰지 못했다. 그러나 거스 히딩크 감독은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전담 물리치료사를 붙여 재활을 도운 결과, 그는 3차전 포르투갈전에서 선발로 복귀했다.

 

히딩크 감독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포르투갈전에서 박지성의 결승골을 도우며 한국의 사상 첫 월드컵 16강 진출에 힘을 보탰고,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는 117분 연장 혈투 끝에 터진 안정환의 골든골을 어시스트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의 역사가 새로 쓰인 결정적 순간마다 그의 발끝이 있었다.

 

강철 체력과 빠른 발, 그리고 상대 수비수를 속이는 ‘헛다리 짚기’ 드리블은 이영표를 상징하는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는 공수 양면에서 팀을 위해 뛰며 4강 신화의 한 축을 담당했고,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왼쪽 풀백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2003년 네덜란드 명문 PSV 에인트호번에 입단한 이영표(오른쪽). AP 연합

 

월드컵 4강 신화는 그의 축구 인생을 세계로 이끌었다. 월드컵 이후 그는 히딩크 감독을 따라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번에 입단했고, 2004-05시즌에는 박지성과 함께 한국 선수 최초로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무대를 밟았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에서 활약하던 이영표.
이영표를 응원하기 위해 사우디 팬들이 ‘LEE’ 글자를 만들어 보이고 있다. 이영표 엑스(구 트위터)

 

캐나다 밴쿠버 화이트캡스 은퇴식에서 두 딸과 함께한 이영표. 이영표 엑스(구 트위터)

 

이후 잉글랜드 토트넘, 독일 도르트문트, 사우디아라비아 알 힐랄을 거쳐 캐나다 밴쿠버 화이트캡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1999년부터 2011년까지 대표팀의 왼쪽을 책임지며 A매치 127경기에 출전했고, 이는 한국 축구 역대 5위 기록으로 남아 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는 어른

 

은퇴 후에도 그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뛰는 장소가 경기장에서 세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선수 시절 헌신의 가치를 배운 그는 은퇴 후에도 그 철학을 놓지 않았다.

 

2019년부터 국제어린이양육기구 한국컴패션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빈곤국 가정을 후원해 왔다. 현재 브라질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아이들을 돕고 있으며, 그의 세 딸 역시 명절 용돈을 모아 또래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다.

 

그의 나눔은 후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스타트업 ‘삭스업’을 창업해 사업가로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이름 그대로 ‘양말을 올려 신는다’는 뜻이지만,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자.”

 

이영표는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선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지속적으로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결국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기부가 아닌 사업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선수 시절 팀을 위해 뛰었던 그는 이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뛰고 있다.

 

8년 만에 KBS 월드컵 해설위원으로 돌아온 이영표. KBS

 

그리고 지금, 월드컵 중계석에서

 

눈빛이 초롱초롱하다고 해서 붙은 별명은 ‘초롱이’. 2002년 월드컵 당시에도 사람들은 그의 맑은 눈빛을 기억했다. 세월이 흘러도 그 눈빛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채소를 돈 주고 사는 모습이 신기했던 홍천의 산골 소년은 월드컵 영웅이 됐고, 이제는 중계석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꿈을 비추고 있다.

 

2026 북중미 월드컵이 열리는 지금, 이영표는 더 이상 그라운드를 뛰지 않는다. 중계석에 앉아 또 다른 누군가의 도전을 이야기한다. 

 

그가 평생 증명해 온 것은 결국 하나다. 묵묵히 노력한 사람은 끝내 빛난다는 것. 초롱이의 눈빛이 지금도 반짝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