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6·3 지방선거 관리 실패는 단순한 행정 착오가 아니라, 헌법기관의 의사결정 부실과 밀실 행정, 현장 대응 무능이 한꺼번에 드러난 총체적 참사였다. 명확한 근거나 의결 절차 없이 투표용지 최소 인쇄 기준을 낮춰놓고도 대응 매뉴얼과 예비 인력은 준비하지 않았다.
선거 당일에는 투표용지 부족 가능성을 현장에서 감지했지만 중앙선관위는 뒤늦게 유권자 항의 전화를 받고서야 사태를 공식 인지했다. 국민참정권을 보장해야 할 선거관리기관이 스스로 국민참정권 침해 사태를 키운 셈이다.
◆회의 없이 기준 낮춘 선관위
10일 더불어민주당 양부남, 국민의힘 김승수·김민전 의원이 중앙선관위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중앙선관위는 지난해 12월10일 사무총장 전결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종합관리지침’을 확정했다. 4년 전 지방선거와 달리 이번 지침에서는 투표용지 인쇄 매수 기준을 60%에서 50%로 줄였는데, 공식 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내부 2명의 전결로 기준이 바뀐 것이다.
◆매뉴얼도 예비 인력도 없었다
중앙선관위는 투표용지 수요 예측이 빗나갔을 때를 대비한 마땅한 대응책도 세워두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투표용지 부족 상황이 발생할 경우 업무 처리 절차와 역할 분담 등 가이드라인이 없었던 탓에 유권자들의 대기 시간은 길어졌다.
선거 당일 예측보다 투표율이 높아졌을 때 잔여 투표용지를 중간에 파악하는 절차도, 부족한 투표용지를 어디서 얼마나 확보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도 없었다. 투표용지를 기다리는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안내해야 하는지도 현장에 제대로 공유되지 않았다. 현장 관계자들이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셈이다.
송파구선관위는 선거 당일 오전 11시 40분쯤 서울시선관위에 투표용지 부족 가능성에 대비해 시위원회 보관 투표용지에 일련번호를 부여할지 여부를 문의했다. 11시 58분엔 송파구 오금동 투표소에서 송파구선관위에 투표용지 부족 대처 방안을 문의했다. 투표소와 송파구선관위 모두에서 비슷한 시각에 자칫 투표용지가 모자랄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송파구선관위는 이후 오후 1시 45분 일련번호가 없는 무번호 투표용지 500장을 사용하기 위해 일련번호 부여 요청을 재차 서울시선관위에 했다. 오후 3시 5분엔 2차 일련번호 부여 문의도 했다.
◆중앙선관위, 유권자 항의 받고서야 인지
정작 중앙선관위는 오후 4시25분에야 사태를 공식적으로 처음 인지했다. 그것도 내부 보고가 아니라 선거상황실이 가락2동 제3투표소의 투표용지 부족과 관련한 민원인 전화를 받고 나서였다. 보고서에는 오후 4시25분 이후 선거 안내 센터 등에 다수의 항의 전화가 왔다고 기록됐다. 중앙선관위가 내부 보고 체계가 아니라 유권자 항의를 통해 투표용지 부족 사실을 안 것이다.
서울시선관위가 송파구에 회신을 준 것은 오후 5시 10분쯤이었다. 서울시선관위는 송파구선관위에 무번호 투표용지 소진을 재확인한 뒤 관내 인근 투표소에 있는 여유분을 회수해 옮기라고 안내했다. 중앙선관위 선거상황실도 5시 송파구를 통해 투표용지 부족 수량 및 수령 여부 파악에 나섰다. 사실상 투표가 끝날 무렵에서야 중앙선관위와 서울시선관위가 행동에 나선 셈이다. 중앙선관위 선거상황실은 오후 6시 20분이 돼서야 송파구 10개 투표소와 강남구·광진구 일부 투표소의 투표용지 부족 상황을 파악했다.
당초 중앙선관위는 투표소 단 14곳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했다고 밝혔지만, 이날 현재 91개 투표소로 늘었다. 서울 42곳, 경기 23곳, 인천 11곳, 대구 4곳, 부산 3곳, 울산·경남·전남 각 2곳, 충북·전북 각 1곳에서 투표용지 부족이 발생했다. 투표용지 부족분도 4726장이라고 보고됐지만 전날 중앙선관위가 제출한 자료에선 7194장으로 늘었다.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투표소에선 최대 105분간 투표가 중단됐고, 송파구 투표소 3곳은 투표 중단 시간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