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과 풍요를 상징하는 숭배의 대상이자 고기와 가죽을 내어주는 실용의 동물, 소. 신성함과 쓸모를 함께 지녔던 그 존재가 공장식 축산과 정육 산업을 거쳐 지금은 컨베이어벨트 위 진공포장된 한 덩이 고기로만 여겨진다. 미국의 문명비평가 제러미 리프킨이 1992년 펴낸 ‘육식의 종말’(Beyond Beef)이 한국어판 출간 25주년을 맞아 개정판으로 돌아왔다. 누적 10만 부가 팔린 스테디셀러다.
책은 소와 인간의 관계를 통해 육식 문화의 형성과 확산을 추적한다. 저자는 소고기를 단순한 음식으로 보지 않는다. 서구 문명의 팽창, 식민지 개척, 목초지 확대, 곡물 사료 산업, 정육 공장 시스템이 맞물려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로 읽어낸다. 한 접시의 고기 뒤에 토지와 노동, 자본, 생태계의 문제가 겹겹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제러미 리프킨/신현승 옮김/시공사/2만원
저자의 시선은 고대의 제의에서 근대의 목축 산업으로, 다시 현대의 공장식 축산으로 이동한다. 영국인의 소고기 선호는 더 넓은 목초지를 요구했고, 그 요구는 아일랜드와 북미 대평원, 아르헨티나 팜파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초원으로 뻗어갔다. 미국 대평원에서 버펄로가 사라지고 육우가 들어선 과정, 곡물이 인간의 식량이 아니라 소를 살찌우는 사료가 된 과정은 소고기 산업의 어두운 이면으로 제시된다.
저자는 현대 축산 산업을 ‘차가운 악’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악은 개인의 잔혹함이 아니라 효율과 이윤, 시장의 언어로 포장된 제도적 폭력이다. 정육 공장의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생명은 생산량으로, 자연은 자원으로, 관계는 비용으로 환산된다. 소를 키우기 위한 목초지는 숲을 밀어내고, 사료용 곡물은 인간의 식량이 될 수 있는 자원을 흡수한다. 소고기 한 덩어리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토지와 물, 곡물, 에너지는 식탁 위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이 육식 문화 전체를 하나의 문명적 위기로 읽어내는 방식은 강하고 논쟁적이다. 그러나 이 책의 힘은 소고기라는 익숙한 식품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생산과 소비의 구조를 낯설게 만드는 데 있다. 독자는 책을 따라가며 식생활이 개인의 취향을 넘어 역사와 산업, 환경의 문제와 연결돼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또 육식의 종말은 식탁에서 고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동물을 대하는 방식을 다시 묻는 출발점에 가깝다. 소가 신성한 존재에서 산업의 부품으로 바뀌는 과정을 통해 저자는 현대 문명이 잃어버린 관계의 감각을 되짚는다.
‘육식의 종말’은 국내에서 광우병, 구제역, 동물권, 기후위기 논의가 불거질 때마다 다시 소환됐다. 이번 25주년 개정판 역시 그 문제의식을 오늘의 독자에게 던진다. 우리가 먹는 것은 어디에서 왔는가. 풍요로운 식탁은 어떤 비용을 치르고 유지되는가. 인간은 자연과 동물을 어느 정도까지 자원으로 다뤄도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