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위론 미사일 날아다니는데…‘장미꽃’ 건네던 미국·이란은 끝났다? [월드컵]

1974년 동·서독의 기적, 1998년 프랑스의 ‘흰 장미’
“축구장은 더 이상 외교의 돌파구가 아니다”
미국 비자 거부에…멕시코 국경 도시로 이동한 이란 대표팀
빅터 차 “정치적 의지 없는 스포츠 외교는 일회성 쇼”

초록빛 잔디 위에서 적대국 선수들이 어깨를 맞대고, 한 손에는 평화의 흰 장미를 들고 웃는다. 국제정치학 교과서에서 ‘스포츠를 통한 극적인 화해’의 상징으로 자주 언급되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미국과 이란의 장면이다. 이란 혁명 이후 철천지원수가 된 두 나라는 축구공 하나를 매개로 전 세계에 짧지만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28년이 흐른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에서는 그 낭만을 기대하기 어렵다. 잔디 위의 장면과는 달리, 그 뒤편에 놓인 국제정치의 긴장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날카롭다.

위 사진은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OpenAI의 대화형 인공지능 ChatGPT 생성 이미지.

12일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북중미 월드컵 개막 직전 발간한 ‘2026년 월드컵 : 스포츠와 갈등’ 보고서에 따르면, 이번 대회 48개국 중 미국-이란을 포함해 이란-사우디, 이란-카타르, 모로코-알제리 등 4쌍의 적대국이 토너먼트에서 맞붙을 확률은 0.35%에 불과하다. 이는 역대 최고였던 1982년 스페인 월드컵(1.09%)의 3분의 1 수준이다.

 

적대국 간 맞대결 확률이 이처럼 낮아진 배경에는 구조적 변화가 있다. 48개국 체제로 대회가 확대되면서 12개 조로 나뉜 대진 구조 자체가 맞대결 가능성을 자연스럽게 희석시킨 데다, FIFA 역시 지역·대륙별 균형 원칙에 따라 조 편성을 운영해 온 영향이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정치적으로 민감한 국가들이 조기에 충돌할 가능성이 더 낮아진 셈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0.35%라는 숫자 뒤에서 현실로 드러나는 장외 갈등이다. 현재 미국과 이란은 중동 지역을 둘러싸고 군사적 긴장을 이어가며 대치 국면에 들어가 있다. 이러한 충돌은 경기장 밖에서 이미 또 다른 방식으로 월드컵 무대를 압박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란 대표팀의 행정 및 지원 인력 15명에 대한 비자 발급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이란 대표팀은 당초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에 마련하려던 훈련 캠프를 취소하고, 멕시코 국경 도시 티후아나로 이동해야 했다. 여기에 미국이 이란 응원단에 배정된 경기 티켓 할당량까지 취소했다는 주장도 나오면서 파장은 더욱 커지고 있다. 28년 전 흰 장미를 주고받던 외교적 상징은 사라지고, 국경의 철조망과 비자 제한이라는 현실적 장벽만 남았다.

 

월드컵 역사상 적대국이 맞붙은 사례는 단 4차례뿐이다. 1974년 체제 경쟁 한복판에서 성사된 동독과 서독의 맞대결, 1986년 포클랜드 전쟁 직후 격돌한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그리고 1998년과 2022년 두 차례 맞붙은 미국과 이란의 경기가 대표적이다. 이 장면들은 때로는 체제 경쟁의 상징으로, 때로는 제한적 화해의 메시지로 회자돼 왔다. 그러나 2026년 현재, 이러한 역사적 순간들은 점차 예외적인 기록으로만 남아가고 있다.

 

보고서를 작성한 빅터 차 CSIS 한국석좌와 앤디 림 부국장은 “월드컵이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할 수는 있지만, 실질적인 정치적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스포츠가 평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고 진단했다. 정치적 결단 없이 작동하는 스포츠 외교는 결국 구조적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위 사진은 AI(인공지능)를 활용해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입니다. 구글의 AI Gemini 생성 이미지

이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에 대한 사흘 연속 공습 가능성을 시사하며 군사 압박 수위를 한층 끌어올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더 크고 강력한 폭격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한편, 이란의 석유·가스 등 핵심 에너지 인프라를 장악하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그는 하르그섬 등 이란의 주요 원유 수출 거점을 언급하며 “머지않은 미래에 석유와 가스 시장의 통제권을 확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필요할 경우 지상군 투입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군사적 압박 여지를 남겼다.

 

이란 최대 원유 수출 거점인 하르그섬은 과거에도 미군 공습 대상이 된 바 있으며, 에너지 인프라를 둘러싼 양국의 갈등은 다시 격화되는 양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 베네수엘라 사례를 언급하며 에너지 통제 전략의 ‘모델’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번 발언은 미국과 이란 간 휴전 논의가 사실상 동력을 잃어가는 가운데 나왔다. 월드컵 개막과 맞물린 시점에도 호르무즈 해협 인근을 포함한 중동 지역의 군사 긴장이 지속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