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는 HMM ‘나무호’ 피격에 사용된 무기가 이란에서 개발된 ‘누르’ 계열 대함미사일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 내렸다. 정부는 이란 정부를 직접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정황과 증거가 이란을 가리키고 있다고 설명하며 이란의 연관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반면 이란 정부는 여전히 관련성을 부인하고 있다.
이란 측의 공식적인 책임 인정이나 공개 사과가 나오지 않는 배경에는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이 처한 정치적 제약과 이란 특유의 권력구조가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고지도자와 혁명수비대가 외교·안보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 속에서 대통령과 외무부가 안보 현안을 독자적으로 결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취임 2주년을 한 달 앞둔 페제시키안 대통령의 입지는 최근 눈에 띄게 좁아지고 있다. 2024년 대선에서 서방과의 대화를 통한 제재 완화를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됐지만, 취임 이후 대미 관계 개선과 제재 완화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경제난이 이어지는 가운데 보수·원리주의 진영의 견제도 한층 거세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입지 좁아진 개혁파 대통령
무엇보다 경제 악화가 부담이다. 페제시키안 행정부는 물가 안정과 경기 활성화를 위해 일부 품목에 대한 수입 규제를 완화했지만, 국내 산업 보호를 중시하는 보수·원리주의 진영의 비판을 받고 있다. 이란은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제재에 대응하며 ‘저항경제’ 체제를 구축해 왔는데, 보수·원리주의 진영은 외국산 완제품 수입 확대가 국내 산업을 위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행정부는 독과점 구조 개선과 물가 안정을 위해 일정 수준의 경쟁 수입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최근에는 페제시키안 대통령의 공개 발언마저 논란이 됐다. 페제시키안 대통령은 지난 8일 엑스(X)를 통해 “전시 상황에서 국영방송과 일부 언론 활동가들이 불공정한 비판의 날을 정부를 향해 겨눈다면 우리는 이에 상응하는 답변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보수·원리주의 성향의 에브라힘 라이시 전 대통령 시절 이란 국영통신 IRNA 사장을 지낸 알리 나데리는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보다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발언에 대응하는 것이 우선 아니냐”고 맞받아쳤다.
페제시키안 대통령은 과거에도 보수·원리주의 진영의 견제를 받은 바 있다. 페제시키안 대통령은 지난 2021년 대선 당시 개혁 성향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됐지만 헌법수호위원회 심사에서 탈락했다. 공식 사유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당시 개혁·중도 성향 후보들이 대거 배제되면서 보수 진영 중심의 선거 구도를 염두에 둔 결정이라는 해석이 제기됐다.
헌법수호위원회는 이란 대통령·국회의원 선거 후보의 자격을 심사하는 핵심 권력기관이다. 위원 12명 가운데 6명은 최고지도자가 직접 임명하며, 나머지 6명도 최고지도자가 임명한 사법부 수장의 추천을 받아 의회가 선출한다. 이 때문에 사실상 최고지도자실의 영향력 아래 있는 기관으로 평가된다.
이 같은 상황은 이란 대통령의 제한된 권한과도 무관하지 않다. 대통령이 행정부를 이끌지만, 실질적인 최고 권력은 최고지도자에게 집중돼 있다. 최고지도자는 대통령과 달리 군 통수권을 보유하고 있으며 혁명수비대와 사법부 등 핵심 권력기관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핵합의 등 핵심 외교·안보 정책 역시 최고지도자실의 동의 없이는 추진하기 어렵다.
◆이란 외무부도 몰랐던 여객기 격추
이 같은 권력구조는 과거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페제시키안 정부에서 전략담당 부통령을 지낸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는 2020년 우크라이나 국제항공 여객기 격추 사건과 관련해 자신 역시 사건 직후 정확한 상황을 보고받지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자리프는 외무장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2020년 당시 이란 행정부 역시 페제시키안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개혁·온건 성향으로 분류되는 하산 로하니 대통령(2013∼2021년 재임)이 이끌고 있었다.
당시 혁명수비대의 오인 사격으로 이란 국민을 포함해 176명이 목숨을 잃었다. 훗날 공개된 녹취에서 자리프는 혁명수비대와 군부가 사실상 외교정책을 좌우했으며 외무부는 주요 안보 현안조차 사후에 통보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밝혔다. 그는 사건 직후 혁명수비대의 격추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군 수뇌부가 이를 부인했고, 외무부 역시 수일 동안 정확한 정보를 공유받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이러한 구조를 고려하면 HMM ‘나무호’ 피격에 사용된 무기가 이란에서 개발된 무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나왔더라도 페제시키안 대통령이나 아바스 아라그치 외무장관이 사건 책임을 인정하거나 공식 유감을 표명하기는 쉽지 않다. 사건이 혁명수비대 책임론으로 확산될 경우 행정부와 최고지도자실·혁명수비대 사이에 잠재돼 있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개혁파 성향의 페제시키안 행정부가 먼저 책임을 인정할 경우 보수 진영의 반발을 자초할 수 있다는 점도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보수·원리주의 진영 설득도 과제
이 때문에 향후 한·이란 관계 관리 과정에서는 행정부뿐 아니라 의회와 보수·원리주의 진영과의 접촉면도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란 의회 아흐마드 나데리 의원과 알리레자 살리미 의원, 제1부의장인 알리 니크자드 의원 등이다. 이들은 이란 의회 내에서도 영향력이 큰 보수·원리주의 진영 인사들로 꼽힌다.
특히 보수·원리주의 성향의 에브라힘 라이시 전 대통령 시절 요직에 있던 인사들에 대한 접근도 중요하다. 라이시 정부에서 정부 공보위원회 의장과 국가 경제 홍보·정보본부장을 겸임한 스페르 할라지가 대표적이다. 페제시키안 행정부 들어서는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범보수·원리주의 진영 내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라이시 행정부 출신 인사들 가운데에는 한국의 이란 동결자금 처리 과정에 여전히 불만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라이시 정부 핵심 참모였던 할라지 전 의장 역시 동결자금 문제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온 인물로 꼽힌다.
미국이 2019년 이란중앙은행을 제재하면서 한국 내에 동결됐던 이란 자금은 2023년 반환됐지만, 이전까지 4년이 소요되면서 이란 내에서는 한국이 문제 해결에 충분히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인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자금 이전 과정은 복잡했다. 국내에 원화로 예치돼 있던 자금을 스위스프랑으로 전환한 뒤 다시 유로화로 환전하는 과정에서 국제 금융기관들이 미국의 세컨더리 제재(2차 제재) 위험을 우려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외교·금융 협의가 장기간 이어졌기 때문이다. 환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환차손 문제 역시 고려해야 했다.
이 때문에 외교가에서는 향후 한·이란 관계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배경을 보다 적극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결자금 이전 지연이 한국 정부의 의지 부족 때문이 아니라 국제 금융망과 미국의 대이란 제재 체계가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였다는 점을 이란 내 범보수·원리주의 진영 인사들에게 충분히 전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HMM ‘나무호’ 사건과 호르무즈 해협 통항 문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이란 외무부와의 소통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최고지도자실과 혁명수비대, 의회 내 보수 진영은 물론 라이시 행정부 출신 인사들까지 포함한 폭넓은 접촉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향후 우리 선박의 안전한 통항 확보와 이란 재건 시장 진출, 동결자금 문제 관리 등을 위해서는 행정부를 넘어 권력 핵심부 전반을 아우르는 보다 입체적인 대이란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