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연주하는 몽돌 ASMR·보랏빛 라벤더 융단…동해로 떠나볼까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선화공주 불치병 고친 감추사

절벽 끝 매달려 천년을 버텨

예쁜 한섬감성바닷길 걸어

파도가 연주하는 몽돌해변까지

무릉별유천지는 요즘 라벤더 융단

 

무릉별유천지 라벤더 정원.

동해선 철길 너머, 해안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기댄 절 한 채. 기암절벽 틈새로 비집고 들어선 법당은 금방이라도 거센 파도에 쓸려갈 듯 위태롭다. 용왕각 앞마당까지 하얀 포말을 밀어 올리는 쪽빛 바다와 갯바위가 만들어 내는 숨막히는 풍경들. 동해에서 가장 낮은 곳에 앉아 천년을 버틴 감추사 마당으로 들어서자 해일에 쓸리고 태풍에 무너져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 잘 늙은 절이 내 얘기 들어보라며 말을 걸어온다.

 

감추사.
세계일보 여행면.
세계일보 여행면.

◆선화공주 전설 깃든 감추사

 

전국에 많은 사찰을 가봤지만 이처럼 바다를 바로 코앞에 품고 있는 절은 처음이다. 동해선 철길을 가로지르는 육교를 건너 솔숲 길 계단을 내려서면 손바닥만 한 감추해변이 등장하고 바다보다 조금 높은 남쪽 절벽에 선 감추사가 보인다. 관음전을 지나 삼성각에 오르자 쪽빛 동해와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 고운 모래사장이 감추사 전각들과 어우러지는 절경에 탄성이 터진다. 소원초를 밝히는 난간에는 해수관세음보살상이 마치 절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우뚝 서 있고, 온화한 미소는 근심 많은 인간들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거리는 목소리를 귀에 들려주는 듯하다. 그 옆에는 높이 약 3m 원추형 돌탑이 섰다. 한 신도가 거센 바닷바람과 파도로부터 사찰을 지키고 안녕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기도탑이다. 꼭대기에는 반원형 돌덩이를 올렸는데 마치 하늘을 훨훨 나는 새를 닮았다.

 

감추해변.

바다와 맞닿은 감추사는 바람이 몹시 거센 날에는 파도가 법당 건물에 직접 부딪칠 정도여서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이와 달리 절 이름 감추사(甘湫寺)는 ‘달콤한 샘물이 솟는 절’이란 뜻이다. 선화공주에 얽힌 드라마 같은 창건 설화 덕분에 이런 이름을 얻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는 온몸이 하얗게 마르는 불치병 백풍병에 걸렸다. 백약이 무효하자 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가 “동해안 감추로 가보라”고 했다. 공주는 머나먼 동해까지 와 자연 동굴에 불상을 모시고 인근 용소에서 3년 동안 목욕재계하며 기도를 올렸다. 마침내 병이 나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동굴 안에 작은 암자를 지었는데 감추사의 전신인 ‘석실암(石室庵)’이다. 전설에 따르면 선화공주는 노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동해를 바라보며 여생을 마쳤고, 그녀의 묘도 이 감추 땅에 조성됐다고 전해진다.

 

감추사 해수관세음보살.

감추사는 조선 시대 이후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 이름만 전해지다 1902년 다시 암자로 세워졌고 ‘신건암’ 또는 ‘대은사 분암’으로 불렸다. 하지만 1959년 초대형 태풍과 해일이 사찰을 덮쳐 선화공주가 기도를 올린 것으로 전해지던 원형 석실과 불상이 통째로 유실됐다. 또다시 폐허가 된 자리에 1965년 감운법사가 찾아와 지금의 감추사를 다시 지었다. 기암절벽이 사방에서 전각들을 껴안는 모양의 독특한 가람 배치가 눈길을 끈다. 특히 법당, 삼성각, 용왕각, 요사채를 바위틈에 교묘하게 끼워 넣듯 건축해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절벽 밀착형 사찰로 탄생했다.

 

사찰 입구 오층석탑도 사연이 있다. 1979년 한 여신도가 세상을 떠나며 아들에게 “감추사에 탑을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아들이 이를 받들어 탑을 조성했다.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과 자식의 효심이 돌 속에 영원히 새겨져 모자의 애틋한 정을 전한다. 감추사에 가려면 신도와 여행자들이 철길을 무단 횡단해야만 했는데, 2021년 46m 길이 육교가 놓이면서 안전하게 감추사를 찾을 수 있게 됐다.

 

한섬감성바닷길

◆한섬감성바닷길 걸어 몽돌해변 가볼까

 

감추사를 나서 육교에서 이어지는 북쪽 산책로를 따라가면 예쁜 한섬감성바닷길을 만난다. 동해역에서 바로 가면 차로 5분 거리다. 해변의 끝과 끝이 한눈에 잡힐 정도로 작지만 그 아담함이 오히려 매력이다. 한적하고 조용해서 바다를 온전히 혼자 품는 기분이 든다.

 

해변을 따라 나무 데크길이 놓여 편하게 걸을 수 있다. 데크 위에는 철제 사각 기둥이 회오리치는 모양으로 꾸민 100m 길이의 리드미컬 게이트를 만들어 놓았다. 밤이 되면 음악과 파도 소리에 맞춰 LED 조명이 시시각각 화려하게 변하는 라이트 쇼가 펼쳐져 인기가 높다. 데크길을 따라 하늘색, 하얀색으로 칠한 테트라포드가 놓여 있어 이름처럼 예쁜 감성을 더한다. 1~12월의 꽃과 그에 어울리는 예쁜 문구를 적어 놓았다. 2월 ‘그저 나를 잊지 말아요 라고 했다(물망초)’, 4월 ‘기쁜 소식이 되어(아이리스)’, 8월 ‘우아하고 아름다운(양귀비)’, 12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동백꽃)’ 등으로 꾸며 따뜻한 감성이 잘 전해진다.

 

한섬감성바닷길.

감추사 절벽 쪽 바다에는 기묘한 모양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천곡마을에서 남쪽 아래에 있어 하대암, 촛대를 닮아 촛대바위로 불린다. 최근에는 제임스 본드 주연 영화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태국 푸켓 팡아만의 바위를 닮아 ‘제임스본드섬’이란 별명도 얻었다. 노란 달과 핑크색 테트라포드로 손하트를 표시한 포토존을 지나면 고운 모래로 덮인 한섬바다가 펼쳐진다. 한적한 해변에는 여행자들이 삼삼오오 앉아 쪽빛 바다와 푸른 하늘이 선사하는 바다 풍경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해변이 끝나면 울창한 소나무숲과 아찔한 절벽 풍경을 즐기며 걷는 한섬감성바닷길 숲 산책로 ‘행복한섬길’이 이어진다. 그 시작점에서 만나는 작은 하천은 천곡동굴에서 내려오는 지하수. 여름에도 얼음물처럼 차가워 ‘한섬’이란 이름을 얻었다. 감추사 육교~한섬해변~고불개~가세마을을 이어가는 산책로는 약 2.2㎞로 가볍게 즐기기 좋다. 뱃머리 전망대, 매바위를 지나면 해변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며 그 끝에 산책로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한섬해변의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 몽돌해변이 숨어 있다.

 

한섬감성바닷길 몽돌해변.

“차르륵 차르륵~” 폭 10여m에 불과한 몽돌해변으로 내려서자 파도가 몽돌을 밀어 올리고 쓸어 내릴 때 만들어내는 연주가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무한반복하며 듣다 보면 저절로 꿈나라로 빠져들 것 같은 매력적인 백색소음이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몽돌 위에 앉아 있으면 된다. 몽돌의 연주와 끝없는 블루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동해안에서 몽돌해변은 흔치 않다. 억겁의 세월 산이 갈라지고 바위가 쪼개지고 살을 에는 바닷바람과 거친 파도가 보듬고 다듬어 보기만 해도 마음이 둥글둥글 부드러워지는 몽돌을 만들었다.

 

무릉별유천지 쇄석장 건물.

◆폐광산의 보랏빛 변신, 무릉별유천지

 

6월이면 동해에서 보랏빛 라벤더 융단이 깔리는 곳이 있다. 신선이 노닐 것 같은 이름의 무릉별유천지다. 동해 무릉계곡 무릉반석의 암각문에서 따왔는데 ‘하늘 아래 경치가 가장 좋은 곳, 속세와 떨어진 유토피아’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 이름이 전혀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라벤더 밭 앞에 서면 금방 안다. 매표소, 갤러리, 전망카페가 있는 쇄석장 건물을 지나면 약 1만8100㎡ 부지를 가득 채운 보랏빛 물결이 장관이다. 이제 막 피기 시작했으니 6월 내내 라벤더 정원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무릉별유천지 라벤더 정원.

이곳은 원래 1968년부터 쌍용C&E가 시멘트 원료인 석회석을 캐던 무릉 3지구 광산이었다. 약 40년의 채광을 마친 광산을 방치하는 대신 동해시와 쌍용C&E가 손을 잡고 2021년 11월 복합체험 관광지로 재탄생시켰다.

 

라벤더 밭 너머에는 또 다른 비경이 기다린다. 해발 270m 절벽 위에 세워진 두미르 전망대에 오르면 에메랄드 빛으로 빛나는 청옥호와 금곡호 풍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석회석을 채굴한 웅덩이 바닥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른 물이 고여 형성된 이국적인 호수와 채굴 과정에서 절개면이 만들어진 바위산이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무릉별유천지 두미르전망대  풍경

다양한 액티비티도 즐길 수 있다. 폐광산 경사면을 내달리는 오프로드 루지, 레일을 따라 숲속을 질주하는 알파인 코스터가 마련돼 있고 청옥호 위에서는 오리배와 문보트를 타며 에메랄드 빛 호수를 유람할 수 있다. 그중 압권은 스카이글라이더. 4명이 동시 탑승 가능한 왕복형 글라이딩 놀이기구로, 호수 위 약 125m 높이에서 777m 거리를 왕복으로 쾌속 질주하기 때문에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도전하기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