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순자산 500조원을 돌파한 국내 상장지수펀드(ETF)가 폭발적인 성장세를 바탕으로 국내 자산시장의 지각변동을 이끌고 있다. 개별 종목 투자의 변동성을 낮출 대안으로 등장한 ETF가 대중적 투자수단으로 안착하면서 개인 투자자의 자산관리 방식을 수동적 저축에서 적극적 투자로 전환시키고 있다. 예·적금과 부동산에 편중됐던 가계 자산 구조도 금융투자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특히 단순히 규모를 키우는 양적 팽창을 넘어 액티브 및 커버드콜 등 다변화된 상품을 선보이며 국내 자산시장의 질적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14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국내 상장 ETF 순자산총액은 12일 기준 약 500조746억원으로 추산됐다. 전체 1137개 상품의 순자산가치(NAV)와 상장좌수를 바탕으로 산출한 수치로, 증시 하락 여파로 이달 5일 500조원 밑으로 떨어진 지 일주일 만에 다시 회복한 것이다.
국내 ETF 시장은 지난달 27일 사상 처음 500조원을 돌파한 뒤 이달 8일 470조원대로 밀렸으나 이내 반등하며 대세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2002년 10월 유가증권시장에서 처음 상장한 ETF의 전체 순자산은 100조원 돌파까지 약 21년이 걸렸지만, 지난해 6월 200조원에 이어 올해 들어 300조원(1월5일)과 400조원(4월15일)을 잇달아 넘어섰다. 이후 42일 만에 100조원이 불어나며 단일 금융상품 시장이 국내 최대 자금 운용처로 꼽히는 퇴직연금 전체 적립금(약 508조원) 규모와 맞먹는 수준으로 팽창한 셈이다. 시장 안팎에서는 이 같은 성장 속도를 고려할 때 연내 600조원 돌파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예·적금 대신 ETF 채우는 ISA
ETF가 증시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은 배경에는 개인 투자자의 실질적인 포트폴리오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가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내 자산 비중의 변화다.
한국거래소와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ISA 계좌 내 정기 예·적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4년 1월 기준 56.5%로 절반을 넘었으나, 2025년 1월 44.5%로 하락한 데 이어 올해 1월에는 29.9%까지 떨어졌다. 같은 기간 ISA 내 ETF 투자 비중은 7.5%(2024년 1월)에서 23.2%(2025년 1월)로 증가하더니 올해 1월엔 35.1%를 기록하며 사상 처음으로 예·적금 비중을 앞질렀다. 원금 보장을 중시하던 자산 형성 계좌에서 저축성 상품이 빠지고 그 자리를 ETF가 빠르게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투자자들의 포트폴리오의 변화는 최근 증시 강세 속에서 위험을 분산하려는 개인들의 움직임과 맞닿아 있다. ETF는 주식처럼 거래소에 상장돼 실시간 매매가 가능하면서도 펀드처럼 여러 종목을 한 바구니에 담아두는 구조다.
개별 종목 직접투자에 따른 급락 위험을 피하면서 지수나 산업 전체의 성장에 투자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기예금의 금리 매력도가 낮아진 상황에서 실시간 매매 편의성과 저렴한 보수라는 ETF의 장점이 부각된 결과다. 키움증권 김진영 연구원은 “안정적인 분산투자가 가능한 상품 중심으로 자금 흐름이 재편되면서 개인 투자자들이 단기적 변동성에 흔들리지 않고 장기적 복리 효과를 누릴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고 분석했다.
분산투자를 겨냥한 대규모 자금 이동은 시장 내 개인의 영향력 강화로 직결됐다. KB증권 분석에 따르면 올해 국내 상장 ETF 시장에서 개인의 순매수와 수익률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동행비율은 47.5%로 집계됐다. 이는 외국인(47.7%)과 대등한 수준으로, 개인이 매수하는 날 ETF 가격이 오르는 현상이 뚜렷해질 만큼 시장 내 비중이 커졌음을 뜻한다. 박유안 KB증권 연구원은 “과거보다 정보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개인들의 매매 패턴이 외국인과 비슷해졌고, 자금 규모가 커지며 주식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도 확대됐다”고 분석했다.
ETF로 유입된 개인 자금이 실제 시장 방향성을 이끌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현대차증권 김재승 연구원은 “과거 코스피의 장기 방향성은 외국인 수급이 결정했으나, 올해 들어서는 개인이 방향성을 결정짓는 주체로 부상했다”며 “개인의 ETF를 통한 투자가 국내 주식시장의 자금 유입 경로와 지형에 본질적인 변화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부동산 편중 완화와 자산 다변화
전체 자산의 대부분이 부동산을 비롯한 비금융자산에 편중해 있던 국내 거시적 자산 구조가 선진국형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진단도 나온다.
키움증권 리서치센터 분석을 보면 따르면 국내 가계의 금융자산 비중은 지난해 말 기준 전체 자산 중 35.0% 수준에 머물러 있고, 나머지 65.0%는 비금융자산에 묶여 있다. 금융자산 비중이 67.0%에 달하는 미국이나 63.0%를 기록한 일본 등 주요 선진국에 비해 자산의 유동성과 다변화 측면에서 뒤처져 있던 구조다.
최근 증시로의 자금 유입 흐름을 감안할 때, 현재 국내 ETF의 비중은 코스피 시가총액 대비 8% 수준으로 미국의 20%, 일본의 9%에 비해 여전히 낮아 추가 성장 여력이 충분하다고도 볼 수 있다. ETF 시장의 팽창이 가계 자산 구조의 질적 개선으로 이어질 것이란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김진영 연구원은 “자금 흐름이 ETF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은 되돌릴 수 없는 변화가 됐다”며 “가계 자산 증식과 장기 저축의 핵심 투자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ETF가 단순한 주식 투자를 넘어 가계의 종합적인 자산 배분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은 실제 투자 현황에서 확인된다. 국내 ETF 시장의 자산별 비중을 보면 주식형 ETF의 순자산총액이 363조9000억원으로 가장 큰 규모를 형성하고 있다. 이어 △채권형 41조3000억원 △혼합형 18조5000억원 △원자재 9조2000억원 △부동산 2조4000억원 순이다. 주식형은 시장 대표지수나 특정 테마 주식에 투자해 고수익을 추구하지만 채권형과 혼합형은 안정적인 이자 수익과 주식의 성장성을 동시에 겨냥한다.
◆지수 추종 넘어 맞춤형 진화
거대한 시중자금이 몰리면서 ETF 시장은 양적 팽창을 넘어 질적 고도화 단계로 진입했다. 단순히 대표 지수를 추종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다변화한 투자 수요를 겨냥한 맞춤형 상품이 속속 등장하는 추세다. 특히 최근엔 초과수익을 추구하는 액티브 상품과 파생 전략을 결합한 특화상품이 시장 확장을 주도하고 있다.
국내 액티브 ETF 순자산총액은 2020년 말 2조1000억원 규모에서 2025년 5월 말 기준 70조9000억원으로 급증하며 전체 시장 내 비중은 35.5%까지 올라왔다. 매월 안정적인 배당 현금흐름을 제공하는 커버드콜 ETF 역시 2023년 말 7748억원에서 2025년 말 11조원 규모로 2년 만에 약 14배 팽창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이달 1일 기준 국내 상장 ETF 가운데 순자산총액이 1조원을 넘는 상품은 105개로 집계돼 지난해 말 66개 대비 59.1% 늘었다. 순자산 10조원을 넘는 초대형 ETF 역시 기존 2개에서 6개로 증가했다.
신규 상품 출시 속도 역시 가파르다. 5월 한 달간 상장된 ETF 종목은 총 32개로 월별 기준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전체 상장 종목 수는 1137개로 늘어 유가증권시장 상장 기업 수(948개)를 웃돌고, 단일 상품 중 순자산 1위인 ‘KODEX200’(28조4381억원)은 코스닥 시가총액 1위 기업의 규모(알테오젠·18조원)를 넘어섰다.
수익률 면에서도 최근 1년 KODEX200의 수익률은 232.61%에 달해, 같은 기간 코스피 지수 상승률(180.65%)을 크게 상회했다. 같은 기간 레버리지를 제외한 일반 ETF 중 수익률 1위는 인공지능(AI) 서버 핵심 부품 기업 등을 담은 ‘RISE 네트워크인프라’로 585.96%나 올랐다.
이처럼 다양한 상품군의 등장은 ETF가 단순한 투자수단을 넘어 종합자산관리 플랫폼으로 진화하는 과정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자본시장연구원 이효섭 선임연구위원은 “과거 단순한 분산투자 바구니였던 ETF가 최근에는 투자 대상과 전략의 경계를 허물며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혁신 플랫폼으로 진화했다”며 “주식이나 실물 상품 등 기초자산의 제약이 사라지고 운용전략을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게 돼 투자 시장의 혁신을 이끌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최근 상장된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품 등에 자금이 몰려 변동성을 키우는 것을 두고는 “저비용 분산투자라는 ETF 본연의 취지로 돌아가 투자자 성향에 맞는 정교한 자산배분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