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 간 사실상의 종전 합의로 중동발 불확실성이 완화되면서 한국 경제도 급한 불을 끄게 됐다.
오는 19일 예정된 종전 양해각서(MOU) 서명을 계기로 호르무즈 해협이 개방될 것이라는 소식에 한때 배럴당 100달러선을 넘나들던 국제유가도 진정세를 보인다.
◇ 유가 진정세에도 공급 정상화는 '장기전'…"최대 2년 시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4일(미 동부시간 기준)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종전 MOU 서명 직후 호르무즈 해협 개방'을 공언하면서 국제 원유시장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는 모습이다.
미국과 이란이 종전 MOU 서명 계획을 밝힌 15일 브렌트유는 배럴당 84달러,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배럴당 81달러 선까지 떨어졌다.
다만 시장 가격 안정과 실물 공급망 복구는 별개의 문제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전쟁 과정에서 피해를 본 중동 산유국 생산시설이 재가동되고 물류망이 정상화되기까지는 상당한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이 지난달 발표한 '국제 유가 및 천연가스 도입 가격 전망' 보고서는 휴전 또는 종전 합의가 이뤄지더라도 당분간 배럴당 90달러 이상의 고유가 흐름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불확실성 완화로 단기적으로 유가가 하락할 수는 있겠지만 생산시설 복구와 공급 회복에는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2년 가까이 걸릴 수 있다"며 "연내 국제유가가 전쟁 이전 수준인 배럴당 60달러대로 복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유가 내려도 체감물가 부담 지속…고환율 압박도
국제유가 상승세가 다소 꺾이더라도 국내 물가 압력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유가 급등 영향이 생산자물가와 수입 물가를 거쳐 소비자물가에 시차를 두고 반영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실제 올해 4월 생산자물가지수는 128.43(2020년=100)으로 전월보다 2.5% 상승했다. 이는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2월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수입품까지 포함한 국내공급물가지수도 전월 대비 5.2% 급등하면서 기업 원가 부담이 빠르게 확대되는 흐름을 나타냈다.
여기에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로 치솟으면서 유가 안정에 따른 수입단가 하락 효과마저 상당 부분 상쇄되고 있다.
중동전쟁 리스크가 빠지면 외환시장이 안정될 것이란 기대가 있다. 그러나 최근 원화 약세의 주 동력이 외국인 주식 순매도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효과가 나타날지에 관해선 의문이 있다 .
원화 약세가 이어질 경우 에너지·원자재 가격 부담이 다시 소비자물가로 전이될 가능성이 높다.
유가와 환율발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지면서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기준금리 인상을 거듭 예고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연내 2회 이상 금리 인상 가능성이 거론된다. 당장 7월 '빅스텝'(0.50%포인트 인상), 또는 7·8월 연속 인상 이야기도 나온다.
금리를 인상하면 가계 이자 비용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 투자 여력이 취약한 중소·영세기업의 경영 부담도 커질 수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연구본부장은 "유가가 일부 안정되더라도 기존 고유가 영향이 시차를 두고 물가에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며 "금리 인상 필요성은 계속 제기될 것"이라고 말했다.
◇ 종전에도 성장률 반등 제한적…'최고가격제 정상화' 제안도
호르무즈 해협 통행 정상화가 이뤄져도 하반기 한국 경제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한국개발연구원(KDI·2.5%)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2.6%) 등 주요 국내외 기관의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 전망치에 하반기 유가 안정과 지정학적 긴장 완화 기대가 이미 일정 부분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양준석 교수는 "종전 합의 후에도 실제 석유 공급 확대 효과를 체감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추가 성장률 개선 폭도 0.1∼0.2%포인트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28일 수정경제전망을 발표하며 미국과 이란 협상이 타결되고 호르무즈 해협 통항이 빠르게 재개되는 경우에는 올해와 내년 성장률이 기본 전망보다 각각 0.1%p씩 높아지고 물가상승률은 올해 0.2%p, 내년 0.3%p씩 하락할 것으로 추정했다.
동시에 유가 안정 계기가 생겼으니 정부의 시장 개입 조치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석유 제품에 대한 최고가격제가 석 달 넘게 유지되면서 시장 가격 기능이 왜곡되고 정부의 정책 부담도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유업계에서는 누적 손실 규모가 약 4조원을 넘어섰다는 분석까지 내놓고 있다.
산업통상부는 앞서 한시적으로 도입한 '석유 최고가격제'의 해제 조건 가운데 하나로 국제유가 안정세를 제시했다.
정규철 전 KDI 경제전망실장은 "국제유가가 안정 흐름을 보인다면 최고가격제 유지 필요성도 점차 낮아질 수 있다"며 "시장 충격을 최소화하는 범위에서 제도를 단계적으로 정상화할 여건이 조성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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