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딸이 함께 ‘텍스트힙’…세대를 묶은 ‘아날로그의 향수’ [라이프+]

‘인벤타리오 2026’ 현장 가보니…10대부터 50대까지 인산인해
취향 소비·SNS 기록 공유 문화·아날로그 감성 유행이 화력 보태
“외국산 못지않은 국산 브랜드 성장” 호평 속 동선 대기 혼란 등 운영 아쉬움도

제주에서 인쇄업을 하는 김봄이(43) 씨는 1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인벤타리오 2026’ 문구 박람회를 찾기 위해 제주에서 서울 강남까지 왔다. 시장조사를 위해 서울행을 택했지만, 현장 티켓 판매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결국 그는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정가보다 비싼 가격에 입장권을 구매한 뒤에야 박람회에 들어갈 수 있었다.

 

1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더 플라츠홀에서 진행된 ‘인벤타리오 2026 문구페어’ 현장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다. 허은선 인턴기자

대전에서 함께 공무원으로 일하는 부녀 김지현(29)·김원철(58) 씨도 이른 아침부터 고속버스를 타고 이곳을 찾았다. 딸 김씨는 “저도 아버지도 문구를 좋아해서 같이 사전 예매를 하고, 아침부터 버스를 타고 왔다”고 말했다. 부녀는 오전부터 오후 5시까지 각자 약 10만원어치의 문구를 구매한 뒤,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해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문구는 학령기를 지난 뒤에도 전 세대의 추억과 소소한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국내 문구 브랜드 역시 함께 성장하면서, 문구 열풍도 계속 이어지는 분위기다.

 

인벤타리오에 방문한 관람객이 입장을 위해 1층에서 대기하며 인산인해를 이뤘다. 허은선 인턴기자

 

‘인벤타리오 2026 문구페어’는 지난 10일부터 14일까지 서울 강남구 코엑스 더 플라츠홀에서 열렸다. 인벤타리오는 국내외 신진·프리미엄 문구 브랜드를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문구 박람회다.

 

행사 개최 후 처음 맞는 주말이었던 13일에는 수천명의 방문객이 이른바 ‘오픈런’을 하기 위해 입장 시간 전부터 줄을 서며 장사진을 이뤘다. 사전 예매에 이어 일반 토요일 입장권도 준비된 수량이 조기 소진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지난해 처음 개최된 인벤타리오는 올해 더 큰 규모로 이뤄졌다. 첫 행사 당시 5일간 약 2만5000명이라는 인원이 방문하자, 주최 측은 1홀에서만 열었던 전시를 올해 2홀까지 확장했다. 참여 브랜드도 69개에서 110개로 늘어났다.

 

사람들이 인벤타리오 필기류 부스에서 각양각색의 펜을 테스트 해보고 있다. 허은선 인턴기자

 

◆ 가성비 대신 ‘가심비’… 문구로 ‘나’를 표현하는 사람들

 

방문객은 10대부터 50대, 여성부터 남성까지 다양했다. 이들이 문구를 좋아하고 박람회를 찾는 데는 저마다의 이유도 있었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비교적 부담이 크지 않은 가격대에서 문구를 통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고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꼽혔다.

 

음식 모형 지우개로 도시락통을 만들 수 있는 제품을 구매한 김봄이 씨는 “직접 (표지와 속지를) 선택해 다이어리를 만들거나, 자기 개성을 살리는 커스텀 제품이 인기가 많은 것 같았다”며 “가격대가 그나마 낮은 문구류나 소품으로도 개성을 살릴 수 있다는 점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후기를 남겼다. 실제로 기자가 만난 중학교 2학년 한주은 학생은 평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내지를 맞춤 제작한 노트를 3만원 정도에 구매했다고 밝혔다.

 

은평구에 거주하는 취준생 한진우(33)씨도 “문구가 소비하기에 적합한 아이템이라고 생각한다”며 “예전에는 문구를 필요해서 샀다면 요즘에는 필요보다는 취향이나 ‘예뻐서’ 산다”고 말했다.

 

이와코 브랜드에서 진행한 ‘지우개 도시락’. 도시락 통을 고르고 뷔페식으로 원하는 것 7개를 고를 수 있다. ‘포인트오브뷰’ 홈페이지 캡처

 

◆ “기록하는 게 힙하니까”…SNS 타고 번진 문구 열풍

 

문구류가 ‘텍스트힙’과 결을 같이 하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자주 공유돼 유행이 됐다는 관점도 있었다.

 

텍스트힙은 독서·기록·공유를 소위 ‘힙하다’고 인식하는 현상으로,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는 독서기록을 비롯해 일기, 다꾸(다이어리꾸미기) 등 각종 기록 콘텐츠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진우씨는 사람들이 인벤타리오 행사에 많이 온 것을 두고 “서울국제도서전 같이 이런 데(문구페어)에 가는 것 자체가 힙하다고 생각해서 유행이 된 것 같다”며 “박람회나 전시회에 가는 게 메이저로 올라온 추세”라고 말했다.

 

부스 입장 예약을 걸어두고 쉬고 있던 30대 여성 임씨도 “사람들이 기록하는 것을 SNS에 많이 공유를 하다 보니 파급력이 더 커진 것 같다”고 짚었다.

 

SNS 속 기록 관련 콘텐츠는 꾸준하고 잔잔하게 인기를 얻고 있다. 인스타그램 캡처

 

◆ 디지털 피로감 속 ‘아날로그 향수’… 국산 브랜드의 질적 성장도 한몫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와 발전도 이유로 들었다. 아날로그에 대한 추구와 국내 문구 브랜드의 성장이 여기에 속한다.

 

이날 임씨는 메모지와 노트 등에 약 20만원어치를 소비했다. 그는 “디지털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이 아날로그적인 기록에 관심을 갖더라”라며 “(자신도) 쓰는 걸 좋아하는데 이왕이면 예쁜 곳에 쓰고 싶어서 행사 때 많이 구매해두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예쁜 것’을 좋아하고 캘리그래피에 관심이 있다고 밝힌 김원철 씨는 “키보드만 두드리면 아쉬워서 아날로그 취향으로 자기 글씨를 살리게 된다”고 얘기했다.

 

대전에서 공무원을 하고 있는 김원철(58)·김지현(29)씨 부녀가 인벤타리오에서 산 문구 용품들. 테이블을 한가득 덮고 있다. 허은선 인턴기자

 

이어 김씨는 “학창 시절에 없던 신기한 문구류가 많이 나와 ‘키덜트’를 자극한다”며 “우리 세대에는 모나미 153 볼펜밖에 없었고 학용품도 일률적이어서 같은 반 친구들 물건이 거의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옛날에는 문구를 꼭 필요해서 샀지만 요즘에는 당장 쓰지 않더라도 어렸을 때 쓰지 못했던 것들을 써보고 싶은 마음에 사게 된다”며 “그런 아쉬움과 외국 브랜드 못지않게 발전한 국산 문구에 대한 신기함이 나이 든 사람의 마음도 동하게 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한진우 씨도 “예전엔 일본 문구류가 잘 돼 있어서 여행 갈 때 사오거나 한국에 수입된 것들을 즐겨 샀는데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제품을 잘 만든다”고 평가했다.

 

◆ 흥행 속 드러난 운영 혼선… 관람객 불만도

 

다만 현장 운영 방식에는 아쉬움의 목소리가 컸다. 이번 인벤타리오는 입장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네이버의 ‘페이스사인’을 도입했지만, 이를 준비하지 않은 사람도 겹쳐 대기 동선에 혼란을 낳았다.

 

관람객들은 “입장 대기줄이 여러 개여서 헷갈리는데 안내도 없고 너무 복잡했다”, “대기시간 1시간 동안 안내 한 마디 없어 취소하려고 했더니 환불이 불가능하다고 해 최악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입장을 포기했다” 등 불만을 토로했다. 온라인 리뷰에도 혹평이 이어졌다. 한 누리꾼은 “관람객에게 과도한 사전 준비를 요구하는 운영 방식”이었다며 “현장 안내와 큐레이션 기능이 부족해 관람객 편의보다 입장객 수 확대에 더 집중한 듯한 인상”이었다는 평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