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이 14일(현지시간) 종전을 위한 양해각서(MOU) 체결에 합의하면서 중동 정세가 극적인 변곡점을 맞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막강한 군사력과 정보력으로 이란을 압박했지만, 이란은 호르무즈해협 봉쇄를 내세워 꿋꿋이 저항하면서 장기전으로 이어질 우려에 처했다. 하지만 미국과 이란 모두 자국 여론이 악화되면서 승리자 없는 ‘피로스의 승리’를 선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인 이날 이란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한 합의에 도달한 것은 유가 고공행진에 따른 국내외 여론 악화와 정치·경제적 부담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과의 전쟁이 교착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자 이란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재개하는 방안을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과의 협상 국면이 늘어지자 지난달 19일 이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려다가 ‘합의가 이뤄질 것’이라는 중동 국가들의 만류에 공격을 보류하기도 했다.
미국과 이란은 지난달 말 부터 산발적인 공방을 주고 받았다. 특히 미국은 지난 8일 이란의 미 육군 아파치 헬기 격추를 계기로 이틀 연속 공습에 나서면서 확전 위기감은 커졌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질 수록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과의 타협 쪽으로 뜻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란의 발전소나 교량, 석유 인프라 시설에 대한 공격을 예고했지만 실행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을 향해 군사적인 압박을 하면서도 타협을 모색한 주요 배경으로 국제유가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꼽을 수 있다.
개전 직후 이란이 호르무즈해협 통제에 나서면서, 전쟁은 트럼프 대통령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전 세계 에너지 수송량의 20%가 지나는 호르무즈해협이 두 달 넘게 봉쇄되자 국제유가는 전쟁 전 대비 40∼60% 높은 수준으로 급등했다. 미국 내 주유소 휘발유 가격도 전쟁 전보다 약 50% 넘게 상승했다.
유가 뿐만 아니라 석유화학제품 수급 불안, 그에 따른 산업 전반의 타격이 이어지면서 강한 인플레이션 압박이 시작됐다. 특히 올해 들어 물가 상승으로 인한 여론 악화가 커지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이 길어질 수록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었다.
유가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미국 국채 투매와 국채금리 상승으로 이어졌다. 국채금리 상승은 트럼프 대통령이 추구하던 기준 금리 인하 기조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특히 이란 전쟁은 개전 초부터 국제사회와 미국 민주당 물론이고 여당인 공화당 일부에서도 우호적이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실시간으로 국내 여론이 나빠지는 걸 봐야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은 40% 아래로 떨어졌다. 지지율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패배로 집권 후반기 국정 동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아메리카 대륙 이외에 다른 곳에서 군사 개입을 반대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에서도 이란 전쟁을 두고 분열 조짐을 보였다.
이란의 상황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이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통제에 맞서 지난달 중순 대이란 해상 봉쇄 카드를 꺼내들면서, 안그래도 최악의 상황이던 이란 경제에 엄청난 충격파를 안겼다.
이란의 법정 화폐인 리알화 가치는 지난달 말 암시장에서 달러당 180만 리알까지 급락, 사상 최저치를 경신했다. 이에 따른 연간 물가상승률은 50%를 웃돌고 있다.
이란 내부에선 식료품, 세제, 위생용품 등 일상 생필품마저 할부로 구매해야 할 정도로 민생은 무너진 상태다. 여기에 국가 재정 수입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원유 수출마저 차단되면서 이란의 경제는 파멸적이었다. 사실상 미국과 이란은 자국의 경제를 두고 상대가 먼저 굽히길 바라는 ‘치킨게임’ 양상이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교량·발전소·석유시설에 대한 공습을 예고한 것도 이란 수뇌부의 결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공습이 다시 시작되면 이란 정권의 생존 자체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이란 원유 수출의 90%를 담당하는 하르그 섬의 원유 터미널 등 핵심 국가 인프라를 점령까지 불사하겠다는 미국의 위협은 이란으로선 커다란 압박이었다.
가뜩이나 이란은 전쟁 전에도 경제난으로 인해 발생한 시민들의 불만을 힘으로 눌러왔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고 경제가 파탄나면서 정권을 향한 분노는 점점 임계점을 향해가고 있었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만약 종전 합의에 실패해 경제난이 더 악화됐다면, 억눌렸던 시민들의 분노가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제기됐다.
이란 정부가 미국과의 종전 협상 과정에서 해외 동결 자산의 일부 해제와 자국 석유·가스·석유화학 제품 등에 대한 일시적 제재 해제 등을 적극 요구한 것 역시 이같은 배경과 맥을 같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