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이유 없이 무서웠다. 아무 의도가 없는 상황에서, 또는 굳이 느낄 필요가 없는 대상에도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심지어 식기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만 들어도 먹은 음식을 모두 토했다. 물론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에도 한 차례씩 음식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섭식장애’를 앓기도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무렵, 화가 이근민은 종합병원에 입원해 여러 검사를 받아야 했다. 진단 결과 ‘경계성 인격장애’로 나타났다. 일종의 정신 질병. 여기에 ‘공황장애’도 부가 증상으로 더해졌다.
그가 병원에서 마주하고 절감한 경험은 두 가지. 하나는 문명사회가 개인을 질병코드로 재단하고 분류하는 병원과 진단의 폭력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환각의 경험이었다. 파편화된 인체와 썩은 내가 진동하는 시체 등이 등장하는 환각을 경험하기도 했다. 너무 갑자기 그에게 닥친 것이어서 결과만 있고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고, 그는 당시를 떠올렸다.
제1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우선 ‘연결된 신체(Connected Body)’와 ‘정신과 의사의 머리(Psychiatrist’s Head)’, ‘유기체 접시(Organic Plate)’ 등 미공개 신작들이, 제2전시장에는 ‘현실 위에 비현실의 침전, 그 경계(Deposition of Unreality upon Real, the Boundary)’를 비롯한 미공개 신작들과 함께 드로잉 연작 ‘환각의 정제(Refining Hallucinations)’ 등이 관객을 맞는다.
이들 작품 안에는 해체되고 흩어진 신체의 형상들이 가득하다. 해체되고 흩어진 신체의 장기와 내장, 혈흔,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들. 이는 환각의 단순한, 1차원적 재현이 아니다. 기억 속 파편화된 이미지와 감각을 끈질기게 추적해 하나의 유기적 화면으로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이 작가는 “제 기억을 베이스로 하고 있지만, 정물이나 인물을 재현하듯이 그리는 게 아니다”며 “당시 봤던 파편화된 인간을 이루었던 내장이나 핏줄, 근육 등을 이성이 있는 상태에서 마치 관찰하듯 캔버스 위에 재조합해 그린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다소 즉흥적일 수도 있고, 원시적인 부분도 있으며, 직관성 같은 것이 섞여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드로잉 연작 ‘환각의 정제’의 경우 밑그림이나 계획 없이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린, 이른바 ‘자동기술법(Automatism)’을 활용해 완성됐다. 화면 속 이름 없는 생명체들은 사회가 부여한 병명과 분류체계 바깥에 존재하는 또 다른 인간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그로테스크한 그림과 형상 앞에 서면 우리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떤 불편함을 마주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마 이근민의 그림들이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했지만 장애와 비장애,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사회적 경계를 넘어 누구나 공유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상태, 조건을 정직하게 보여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에너지가 분출하는 화면 위의 강렬한 이미지는 바로 작가 자신과 우리를 구속해 온 어떤 사회적 틀에서 벗어나려는 해방의 몸짓일지도.
PKM갤러리 박경미 대표는 “개인의 내면을 꺼내 보여준다는 게 작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데, 이근민 작가는 특유의 경험을 바탕으로 화면에 이를 과감하게 구사한다”며 “이 지점이 관람객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동시에 회화라는 끝없는 심연의 세계로 이끄는 동력이 된다”고 소개했다.
젊은 작가 이근민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사회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름으로 구분짓는 인간 존재의 경계를 탐구하며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왔다.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2009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서울, 뉴욕, 파리, 베를린 등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을 열었다. 2022년 스페이스K에서 열린 개인전 ‘그리고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를 통해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의 작품은 스페이스K, 마드리드 콜렉시온 솔로, 박서보재단 등에 소장돼 있다.
관객들이 전시장에서 본 것은 단순히 자기 위안이나 치유, 개인적 감정의 발산이 아닌, 우리가 직시하길 외면해 온 불온한 내면의 풍경, 배제의 존재와 감정일지도. 그러니까 “사회시스템이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해 온 존재들”을 화면 위로 소환한 혁명 같은 작업을 보고 온 것인지도.
“저는 (쾌 또는 불쾌를) 의도하진 않았습니다. 환각이라는 단어가 대안이 없어 그냥 환각이라고 표현을 하지만, 환각이 병의 증상으로 정의되기 전에 상태를 그리는 것이지요. 관객이 (저의 그림을) 보고 겁을 먹을 수도 있고 불쾌해 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좀 흥미가 생기시는 분들은 제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를 찾아보실 수 있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