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왜 영성을 찾는가—세계사를 움직인 15인의 영성] 목차
<1> 모세-“노예 민족에게 법과 신을 준 사람”
<2> 공자-“혼란한 시대, 인간의 질서를 묻다”
<3> 노자-“세상을 거슬러 흐르지 말라”
<4> 석가모니-“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
<5> 조로아스터-“선과 악의 전쟁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6> 예수-“사랑은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가”
<7> 무함마드-“신앙은 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하는가”
<8> 성 아우구스티누스-“인간 내면에도 제국은 존재한다”
<9> 토마스 아퀴나스-“신과 이성은 화해할 수 있는가”
<10> 마르틴 루터-“양심은 교황보다 강한가”
<11> 존 웨슬리-“대중 속으로 들어간 종교”
<12> 라마크리슈나-“모든 종교는 같은 산을 오르는가”
<13> 달라이 라마 14세-“인간은 증오 없이 저항할 수 있는가”
<14> 문선명·한학자-분열된 인류는 다시 한 가족이 될 수 있는가
<15> 간디-“정치는 영혼을 가질 수 있는가”
◆도덕이 권력보다 앞서야 한다는 신념
오늘날 공자는 흔히 도덕과 예절을 강조한 사상가로 기억된다. 그러나 실제의 공자는 단순히 “착하게 살자”고 말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무너져 가는 세계 속에서 인간 사회를 다시 붙들 수 있는 질서가 무엇인지 평생 고민했던 인물이다. 공자의 삶은 의외로 고단했다. 그는 노(魯)나라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넉넉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성서 속 모세가 광야를 경험했다면, 공자는 끊임없는 현실의 벽을 경험한 사람에 가까웠다. 그는 젊은 시절 가축 관리 같은 일을 했다고 전해진다. 훗날 제자들을 가르치며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지만, 공자의 꿈은 교육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이상 정치를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공자는 한때 노나라의 관리가 되어 정치 개혁을 시도한다. 그는 권력보다 도덕이 앞서야 한다고 믿었다. 지도자가 먼저 바르게 서야 백성도 바르게 된다고 생각했다.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다.” 이 짧은 말 속에는 공자의 철학이 응축돼 있다. 그는 법과 처벌만으로는 사회를 오래 유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고 서로를 존중할 때 공동체는 비로소 안정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이상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의 군주들과 권력자들은 공자의 도덕 정치보다 당장의 힘과 이익에 더 관심이 많았다. 결국 공자는 나라를 떠나 여러 지역을 떠도는 긴 유랑 길에 오른다. 제자들과 함께 수레를 타고 각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지만, 냉대와 실패를 반복했다. 정적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은 적도 부지기수였고, 굶주림 속에 길이 막혀 아사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 오죽하면 당대 사람들은 유랑하는 그를 두고 “주인 없는 상갓집 개 같다(喪家之狗, 상가지구)”며 대놓고 조롱했을까. 오늘날 세계 4대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가 살아생전에는 굶주림과 냉대를 견디며 떠돌던 이상주의자로 보였던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실패 속에서 공자 사상의 인간적 깊이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는 세상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쓰라린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나, 인간에 대한 기대를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천하를 유랑하며 다듬어진 인간적 깊이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은 ‘인(仁)’이었다. 그는 인을 “사람을 사랑하는 것(仁者愛人)”이라고 설명했다. 인은 흔히 ‘어질다’로 번역되지만, 친절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마음, 타인을 향한 공감과 책임 의식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공자는 인간 사회가 유지되려면 먼저 인간이 서로를 사람답게 대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가족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군주와 신하 사이의 책임과 도리를 강조했다.
현대인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답답함이나 권위주의를 먼저 떠올릴 수도 있다. 실제로 후대의 유교 문화는 때로 지나친 위계질서와 형식주의로 흐르기도 했다. 여성 억압이나 경직된 신분 질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 측면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자 사상의 모든 모습은 아니다.
혼란한 시대를 살았던 공자에게 중요한 가치는 “인간다움의 회복”이었다. ‘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군자구제기, 소인구제인)’ 즉, “군자는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원인을 찾는다”는 이 말은 인간다움이란 타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성찰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그는 힘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도 인간이 최소한의 품격과 책임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흥미로운 것은 공자가 신비주의적 종교인과는 다소 다른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그는 귀신과 사후세계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았으나, 말을 아꼈다. “삶도 아직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는가(未知生 焉知死)” 이 말은 공자의 현실주의를 보여준다. 그는 하늘(天)을 말했지만, 인간의 현실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공자는 초월보다 인간 세계 자체를 더 깊이 고민한 사상가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의 사상이 종교성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다. 유교는 오랜 세월 동안 철학을 넘어 동아시아 사회의 정신적 질서로 기능했다. 조선에서는 국가 운영의 중심 이념이 되었고, 한·중·일 동양 3국의 가족문화와 교육관, 인간관계의 뿌리에도 깊게 스며들었다.
◆초월적 신비주의를 거부한 현실주의 영성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에는 유교적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 어른에 대한 존중, 교육열, 가족 중심 문화, 관계 속 책임 의식 등은 모두 공자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적지 않다.
공자는 살아 있을 때 거대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끝내 자신의 이상 국가를 만들지 못했고, 떠돌이 사상가처럼 생을 마쳤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의 실패는 이후 수천 년 동안 동아시아 문명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 인류 역사에는 세상을 무너뜨린 혁명가들도 많았지만, 공자는 무너지는 세계를 붙들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세계 역시 또 다른 혼란 속에 있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 사이의 신뢰는 흔들리고, 연결은 많아졌지만, 관계는 더 쉽게 깨진다. 사람들은 자유를 말하지만 동시에 깊은 고립을 경험한다.
후대 사람들이 공자를 높게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예절과 도덕만 가르친 사람이 아니라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근본 질서가 무엇인지를 평생 고민했던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공자는 힘과 법만으로는 공동체를 오래 유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이 서로를 존중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가질 때 사회는 비로소 안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문장 중 하나인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오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다. 즉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이 말은 오늘날에도 보편적 윤리처럼 받아들여진다. 시대와 문화를 넘어 인간관계의 기본 원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후대는 공자가 지도자의 도덕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법과 처벌만으로 백성을 통제하면 사람들은 벌만 피하려 할 뿐이라고 보았다. 반대로 지도자가 스스로 바르게 서면 백성 역시 자연히 바르게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공자의 정치 철학은 권력보다 품격과 책임을 강조하는 데 특징이 있었다.
◆배움과 보편 윤리로 문명의 주춧돌을 놓다
공자는 배움에 대한 태도에서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 그는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고 말하며 배움 자체의 가치를 강조했다. 또한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焉, 삼인행 필유아사언)”고 하여, 누구에게서든 배울 게 있다는 겸손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동아시아에서 교육과 학문을 중시하는 문화가 오랫동안 이어진 데에는 공자의 영향이 매우 컸다. 그는 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신이 담당하던 질서의 기능을 인간의 도덕과 관계 윤리 속으로 옮겨 놓았다. 인간은 초월적 신에게만 구원을 갈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성찰과 책임을 통해 이 땅 위에 정당한 질서를 세워갈 수 있는 주체임을 증명한 것이다. 2500년 전 천하를 떠돌며 굶주리던 늙은 사상가가 남긴 영성의 힘은 오늘날 풍요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 문명에게 인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여전히 매섭게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