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온천 마을 ‘에비앙레뱅(Évian-les-Bains·에비앙)’. 이곳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세계 무대에 ‘인공지능(AI) 기본사회’라는 화두를 던졌다.
기술 격차가 경제 격차로 이어지는 디스토피아를 막자는 거대한 외교 구상의 메아리는 태평양을 건너 곧장 국내로 전해졌다. 과거 이 대통령이 도지사 시절 ‘기본시리즈’의 씨앗을 뿌리고 꽃을 피운 경기도가 체감하는 이 단어의 의미는 남달라 보인다.
◆경기연구원 ‘기본사회연구단’ 가동…추미애 ‘직속 위원회’ 설치
17일 경기도 등에 따르면 이 대통령이 최근 기본사회를 반복해 언급하면서 과거 도에서 이뤄졌던 관련 정책들의 부활 움직임에 관심이 쏠린다.
AI 전환과 초고령사회 진입, 기후위기 등 복합위기의 돌파구로 기본사회 담론이 부상한 뒤 경기도가 정책 구체화를 위한 거대한 ‘실험장’으로 변모하는 모양새다.
이날 이 대통령은 에비앙에서 AI 분야의 기술 격차가 경제적 격차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며 기술 발전에 따른 결과물을 모든 국가와 공유하고 함께 성장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 ‘평등’에 무게가 실린 셈이다.
이런 정부 정책 기조를 반영하듯 경기도에선 정책 구체화를 위한 포럼이 가동되고, 추미애 도지사 당선인 측에선 실행 전략을 담은 정책보고서가 마련됐다.
추 당선인 역시 공공투자와 개발이익을 도민에게 환원하는 경기도형 기본소득 구상을 제시한 바 있다.
실제로 경기연구원은 지난 4월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제1회 GRI 기본사회포럼’을 열고 본격적인 정책 모델 수립에 착수했다. 강성천 경기연구원장은 “기본사회는 이제 시대적 담론을 넘어 나아가야 할 구체적 목표”라며 “신설된 ‘기본사회연구단’을 중심으로 경기도가 선도적 실험장이 될 수 있도록 연구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포럼에선 기존 복지국가의 한계를 보완할 생애기본수당과 의료·교육·주거 등 보편적 기본 서비스, 기회소득 등 경기도 특화 프레임이 대거 제안됐다.
◆생애기본수당·보편 서비스 등 프레임 제시…‘BSI 지표’ 구축
관련 정책 실험들은 지난 지방선거 과정에서 공약으로 구체화했다. 추 당선자 직속 기본사회위원회는 선거 직전 출범 회의를 갖고 ‘경기도형 기본사회 2.0 정책보고서’를 내놓았다. 보고서는 플랫폼, 돌봄경제, 디지털, 기본주택·교통, 기후·에너지 등 ‘7대 핵심 정책’을 주축으로 삼는다.
AI 기반의 행정혁신과 디지털 포용, 재생에너지 100% 활용(RE100) 등을 통해 ‘기회와 안전이 공존하는 사람 중심의 경기도’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이 대통령의 도지사 시절 기본사회 정책을 ‘경기도형 기본사회 1.0’으로 명명한 뒤 현 정부의 기본사회 모델과 통합해 새로운 ‘경기도 기본사회 2.0’ 모델을 제안했다.
도내 31개 시·군의 삶의 질과 정책 효과를 다각도로 평가할 ‘경기도 기본사회 지표(BSI)’ 구축 방안도 포함돼 지역 간 격차 해소의 기반이 마련됐다.
기본사회위원회 관계자는 “기술 발전의 혜택이 특정 계층이 아닌 모든 도민에게 돌아가도록 생활밀착형 정책 모델을 선도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선 시·군 역시 바쁘게 뛰고 있다. 정명근 화성시장은 전국 첫 기본사회 조례를 지난 4월 공포·시행한 뒤 기본소득·기본서비스·사회연대경제의 3개 축을 토대로 100개 사업을 추진 중이다. 예산 규모만 4910억원에 달한다. 광명시에선 3선 박승원 시장이 공약한 기본사회 정책 5개년 계획과 의료·요양·주거·일상 통합 돌봄체계 등을 중심으로 광명형 기본사회 구축이 진행되고 있다. 이재준 수원시장도 AI 기술을 활용해 기본권을 보장하는 ‘모두의 AI 시대’ 정책을 실행단계에 올려놓았다.
◆‘소득보장’이란 본질 공유…기본·기회소득 접점은?
다만, 화려한 부활의 그늘 이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민선 8기 김동연 지사 체제에서 싹을 틔웠던 ‘기회소득’과의 조우에서다.
예술인, 농어민, 장애인, 체육인 등의 활동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보상하며 김동연식 ‘휴머노믹스’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던 기회소득은 애초 복지부의 조건부 승인이라는 한계를 안고 출발한 ‘미완의 정책’이었다.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지만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일정 소득을 지급해 자존감을 높이고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방식이다.
김 지사는 이를 기본소득과 차별화된 경기도형 소득보장 모델로 키우려 했다. 민선 8기 후반부로 갈수록 대상이 확대되며 김 지사의 철학을 대표하는 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현금 지원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가치에 따른 보상이라는 개념을 세웠지만, 출발부터 성과 입증에 발목을 잡혔고 사업 존속이라는 과제를 안게 됐다.
정권 교체와 지자체장 전환기를 맞아 기회소득이 거대한 기본소득의 물결 속에서 동력을 잃고 멈춰 서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팽배하다. 설계 방식은 다르나, 두 정책 모두 ‘소득보장’이라는 본질적 질문을 공유하는 만큼 상호 보완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이런 가운데 이 대통령과 여당이 ‘기본시리즈’ 정책을 두고 떠안은 부담도 적지 않아 보인다. 인구 감소지역 주민에게 조건 없이 매달 15만원의 지역화폐를 지급해 영속성을 보장하려는 ‘농어촌 기본소득’이 재정 확대의 분수령에 섰기 때문이다.
2021년 경기도는 농촌기본소득 사회실험을 시행하며 논의를 키웠고, 이 대통령이 처음 대선에 나선 2022년 당시 공약으로 구체화됐다.
이 대통령은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제도의 상설화를 언급했지만, 일각에선 현금성 복지를 확대하는 데 대한 우려가 일고 있다. 경기도에서 태동한 농어촌 기본소득이 지방소멸의 해법이 될지, 재정 부담을 키우는 정책에 그칠지 갈림길에 선 것이다.
이 대통령이 쏘아 올린 기본사회라는 공이 경기도라는 실험장에서 어떤 결실을 볼지 안팎의 이목 역시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