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신화, 한민족의 성모 인식과 여신 숭배의 전통
조선 중기 이후 가부장적 유교 질서가 고착되기 이전, 한반도의 고대 지층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여성의 지위와 위상이 작동하던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무대가 바로 고려시대이다. 고려의 여성은 가부장제의 그늘에 가려진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가문의 전통을 당당히 잇고 혈통의 정당성을 매개하는 생활문화의 중심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실체는 오늘날 우리가 논의하는 평면적인 여성 권익의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
이와 같은 인식은 『고려사(高麗史)』 기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성종과 예종대 국가 제례인 팔관회(八關會)에서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동신성모(東神聖母)로 숭배된 사실은, 고려 사회가 여성 존재를 단순한 생물학적 모성이 아니라 국가 질서를 지탱하는 신성한 근원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고려는 여성 국신 전통이 제례와 국가 체계 속에서 실질적으로 작동하던 사회였다.
고려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여신 신앙 역시 이러한 구조를 뒷받침한다.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여신 숭배는 고려에 이르러 지역 신앙을 넘어 국가적 차원의 정신 질서로 재편되었다. 지리산 성모와 선도산 신모와 같은 존재들은 단순한 신앙 대상이 아니라, 생명을 생성하고 공동체를 보호하는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이러한 인식은 자연과 국가를 연결하는 상징 체계로 기능하였다. 고려인들이 대지를 ‘어머니’로 이해하고 그 질서를 국가의 안정과 연결 지은 점은, 모성이 단순한 정서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를 조직하는 원리로 작동했음을 시사한다.
고려 왕실의 성모 인식은 건국 서사인 『고려세계(高麗世系)』를 통해 보다 구조적으로 확인된다. 태조 왕건의 가계가 서해 용왕의 딸인 용녀와 같은 신성한 여성과의 결합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는 서사는, 왕권이 단순한 혈연 계승이 아니라 ‘신성한 모계적 근원’을 통해 정당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여성을 남성 권력의 보조적 존재로 위치시키기보다, 왕권의 성립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주체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은 단순한 건국 신화에 그치지 않고 제도적 언어로도 확장된다. 고려 왕실에서 국왕이 자신의 어머니를 ‘성모’로 호명한 사례는, 모성을 개인적 관계를 넘어 공적 권위의 근거로 제도화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성모’는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자 동시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상징적 개념으로 작동하였다. 즉, 모성은 감정적 가치가 아니라 통치 질서를 정당화하는 핵심 개념으로 기능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난 여성 인식 역시 이러한 구조를 뒷받침한다. 문헌에 등장하는 여신들은 창조와 수호, 풍요를 관장하는 존재로 서술되며, ‘성모’라는 칭호는 신화적 존재뿐 아니라 왕실 여성에게까지 확장되어 사용되었다. 특히 예종과 의종이 즉위 후 자신의 어머니를 왕태후로 책봉하며 ‘성모’로 칭송한 사례는, 모성이 왕권의 초월적 정당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였음을 보여준다. 결국 고려 사회에서 ‘성모’는 단순한 존칭이 아니라, 신성성과 정치적 권위를 동시에 매개하는 개념적 장치였다. 이는 모성이 생물학적 역할을 넘어, 사회 질서와 권력 구조를 형성하는 중심 원리로 작동했음을 의미한다.
◆ 딸의 이름으로 새겨진 유산, ‘내 집’에서 당당히 꽃피운 고려 여인
『고려사(高麗史)』 형법지는 부모의 유산을 분배할 때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행위를 엄히 금지하고 있다. 이는 고려 사회에서 상속권이 성별에 따라 본질적으로 차등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법제적 근거다. 실제로 고려의 여성은 혼인 전후를 막론하고 전답과 노비를 소유할 수 있는 독립된 경제 주체였으며, 남편 사후에도 해당 자산을 직접 관리·운영하며 가문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여성을 단순한 가족 구성원이 아닌, 경제와 혈통을 동시에 유지하는 핵심 주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여성 중심 구조는 혼인과 가족 제도에서도 확인된다. 남성이 여성의 집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남귀여가(男歸女家)’의 관습은, 고려 여성이 가정 내에서 종속적 위치가 아니라 공간과 관계의 중심에 서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성은 ‘내 부모의 집’을 기반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가문을 운영하는 실질적 주체였으며, 이는 가족 구조 자체가 모성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제사와 호적 제도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뚜렷하게 나타난다. 딸이 아들과 교대로 제사를 담당하는 윤행(輪行)의 관습, 자녀의 이름을 출생 순서대로 기록하는 호적 체계는 성별에 따른 위계보다 개인의 존재를 동등하게 인정하는 사회 인식을 반영한다. 이러한 일련의 제도적·관습적 구조는 고려 사회에서 여성이 단순한 보호 대상이 아니라, 가문과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 주체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고려 사회에서 확인되는 여성의 법적·경제적·가족적 지위는, 모성이 단순히 어머니 역할을 넘어 사회 구조를 형성하는 원리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 지워지지 않은 이름, 역사가 기다려 온 주체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적 심성 속에서 남녀의 관계는 대립과 쟁취의 투쟁 구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만물을 조화롭게 생성하는 생명의 근원적 질서이자, 천리(天理)를 구성하는 본연의 원리로 이해되어 왔다. 우리 역사 속에서 여성은 결코 수동적인 보호의 대상에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생명을 잉태하는 성소(聖所)이자, 파편화된 관계를 유기적으로 조직하며 공동체의 명맥을 유지해 온 ‘실체적 구심점’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주체적 여성관은 특정 시대의 일시적인 사상적 주장이 아니라, 수천 년간 축적된 문화적·사회적 층위 속에서 쉼 없이 변주되며 그 존재감을 증명해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고려 시대가 보여준 여성의 독자적인 지위와 당당한 위상은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가부장제의 거센 파고 속에서도 하늘이 끝내 지켜내고자 했던 ‘여성 신성(Divine Feminine)’의 불씨였다. 비록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가 그 이름을 잠시 가렸을지언정, 우리 민족의 영성 깊은 곳에 흐르던 ‘주체적 모성’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았다. 역사는 이 잠들지 않는 생명의 원리가 ‘독생녀’라는 완성된 형상을 입고, 인류 문명의 새로운 방향타가 되어 나타날 그날을 간절히 기다려 온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염경애묘지명(廉瓊愛墓誌銘)』이다. 중국의 묘지명이 시대가 흐를수록 여성의 이름을 생략하거나 익명화하는 경향을 보인 것과 달리, 고려는 여인의 고유한 성명을 온전히 기록함으로써 그 존재의 실체를 역사 속에 남겼다. ‘경애’라는 이름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 한 개인이 독립된 인격과 사회적 위상을 지닌 주체였음을 증언하는 기록이다. 이름을 지운 사회와 이름을 남긴 사회의 차이는 곧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의 차이를 드러낸다.
묘지명에 기록된 염경애의 생애는 고려사회의 여성의 지위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그녀는 가문의 경제를 책임지고 삶의 방향을 주도하며, 남편에게 현실적 판단과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이는 여성을 수동적 희생의 존재로 한정하지 않고, 가문과 사회를 운영하는 실질적 중심으로 인식했던 고려 사회의 특징을 반영한다. 즉 당시의 모성은 여성이 단순한 양육자 모델을 넘어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는 ‘실천적 권위’로 작동하고 있었다.
이렇듯 고유한 이름을 통해 고려 여인들은 개별적 자아를 보존했고, 여성 스스로의 주체적 역할을 통해 위상을 스스로 증명했다. 우리 민족사의 심층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하나의 거대한 ‘섭리적 방향성’이자, 여성이라는 신성한 주체를 지우지 않고 온전하게 드러내려 했던 문화적 응집의 결과다. 고려 사회는 이러한 영적 흐름을 제도와 기록의 층위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형상화했던 황금기였으며, 그 시공간 속에서 여성은 추상적인 상징에 머물지 않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직접 돌리는 ‘실체적 주체’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결국 역사가 끝내 지워내지 못한 그 이름들과 생의 기록마다 새겨진 주체적 삶은 한민족 정신사에 흐르는 근원적 통찰을 웅변한다. 인류 역사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거대한 축이 대등한 위격으로 화합할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진리에 대한 자각이다. 특히 우리 민족의 문화적 유전자 속에는 여성을 단순히 남성의 보조자나 가계의 전승 도구로 보지 않는 독특한 인식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다.
고려 사회가 증언하듯, 여성은 단순히 생명을 잉태하는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 가문의 경제적 토대를 관장하고 사회적 질서를 주도적으로 설계하는 공동체의 입법자이자 실천적 주권자였다. 이는 여성이 남성 중심 서사의 보조적 수단이 아니라, 인류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중심을 잡는 핵심적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은 단순히 흩어진 사건들의 나열로 볼 수는 없다. 대신에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이 하나의 숭고한 정점을 향해 억겁의 시간 동안 축적하려는 지향성을 갖는 ‘섭리적 궤적’이 작동하고 있다는 해석이 오히려 합리적일 수 있다. 고려의 당당한 여인들로부터 염경애라는 실체적 주권자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가 지켜온 그 모든 ‘지워지지 않은 이름’들은 이제 인류의 참어머니이자 구원의 본체인 ‘독생녀(獨生女)’라는 하나의 성호(聖號)로 수렴된다.
독생녀는 과거의 조력자적 여성상을 완전히 탈피하여, 스스로 섭리의 중심에 서서 인류를 하늘부모님의 혈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천주적 주권의 실체로서 그 사명을 완성하고 계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피할 수 없는 본질적인 물음과 마주한다. 영겁의 세월 동안 우리 민족사의 심층에 축적된 이 강인한 ‘여성 주체성’의 물줄기는 과연 무엇을 향해 굽이쳐 왔는가? 역사적 고비마다 끊임없이 요청되고, 때로는 신화와 여왕의 통치로, 때로는 고려 여인의 당당한 이름으로 분출되었던 이 거대한 기류는 단순한 지정학적 우연인가, 아니면 인류사적 대전환을 앞두고 하나의 ‘궁극적 완결’을 향해 치밀하게 예비된 섭리의 과정이었는가를 말이다.
고기훈 박사(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