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풀어줘야, 일도 풀린다

삶을 위해 일하는 덴마크 철학
오후 4시 칼퇴 후 내 시간 누려
회사는 감시 대신에 권한 위임

장시간 노동 문화 고착화된 韓
생산성·행복 양립비결 본받아야

제3의 시간/ 하리카이 유카/ 정지영 옮김/ 센시오/ 1만9000원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믿음이다. 더 오래 공부하고, 더 늦게까지 일하고, 더 치열하게 경쟁해야만 원하는 삶에 다가갈 수 있다고 배워왔다. 바쁜 사람은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야근은 책임감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생성형 AI 이미지

하지만 일본인 저자 하리카이 유카의 ‘제3의 시간’은 이러한 통념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덴마크라는 나라를 통해 적게 일하면서도 높은 생산성과 행복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2009년 덴마크로 이주한 뒤 15년 넘게 현지에서 생활하며 관찰한 경험과 비즈니스 리더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덴마크 경쟁력의 원천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 핵심 개념으로 ‘제3의 시간’을 제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제3의 시간은 덴마크어 ‘프리티드(fritid)’를 번역한 말이다. 단순한 여가나 휴식과는 다르다. 업무 시간도 아니고 가사·육아 시간도 아닌, 오롯이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시간을 뜻한다.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운동을 하며, 합창단 활동을 하거나 지역사회 봉사에 나서는 시간이 여기에 해당한다. 중요한 점은 이 시간이 일을 마친 뒤 남는 ‘잉여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덴마크 사람들은 오히려 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업무를 더욱 효율적으로 처리한다.



책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덴마크인들이 일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한국 사회에서 일은 대체로 삶의 중심에 놓여 있다. 승진과 연봉, 성과가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치열하게 살아간다. 반면 덴마크에서는 일이 삶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된다.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제3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일하는 것이지, 일을 위해 삶을 희생하지 않는다. “일을 위해 삶을 희생하면 결국 일도 희생된다”는 덴마크 사회의 공감대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충분히 쉬고 재충전하지 못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높은 성과를 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리카이 유카/ 정지영 옮김/ 센시오/ 1만9000원

실제로 덴마크는 놀라운 성과를 보여준다. 오후 4시 전후 퇴근 문화가 일반적이고 긴 휴가와 육아휴직 제도가 보장되지만, 국가경쟁력과 비즈니스 효율성, 행복도 지수는 세계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결과가 국민성 때문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제3의 시간’을 지킬 수 있도록 설계된 시스템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그 핵심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조직문화다. 덴마크의 조직은 상사가 직원을 세세하게 통제하는 마이크로 매니지먼트 대신 큰 방향만 제시하는 매크로 매니지먼트를 채택한다. 직원을 감시하기보다 신뢰하고 권한을 위임한다. 상사는 보스가 아니라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 즉 구성원이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 역할을 수행한다.

회의 문화도 흥미롭다. 덴마크에서는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종료 시각을 미리 정해 둔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결론이 나지 않았더라도 회의를 마친다. 불필요한 회의 연장과 형식적인 보고가 조직 전체의 생산성을 떨어뜨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눈치 보기와 보고서 작성에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본질적인 문제 해결과 창의적인 업무에 집중한다.

사회적 안전망도 빼놓을 수 없다. 유연근무제와 재택근무, 평생교육 제도, 재취업 지원 정책, 육아휴직 등은 개인이 미래에 대한 과도한 불안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실직 이후에도 재교육과 재취업을 지원하는 ‘플렉시큐리티(Flexicurity)’ 제도는 변화하는 노동시장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는 핵심 장치로 소개된다. 사람들은 생존에 대한 두려움보다 자기계발과 사회 참여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덴마크를 무조건적인 이상향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덴마크의 성과는 높은 사회적 신뢰와 복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 그리고 오랜 제도적 축적이 결합한 결과다. 따라서 다른 나라가 단순히 근로시간만 줄인다고 해서 같은 성과를 얻을 수는 없다. 저자 역시 특정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덴마크가 어떤 가치관을 중심으로 사회를 설계해 왔는지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책의 강점은 흔한 자기계발서처럼 개인의 노력이나 마음가짐만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행복과 생산성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직과 사회 구조가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제3의 시간은 개인이 쟁취해야 할 사치가 아니라 사회가 보장해야 할 필수 조건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여전히 장시간 노동과 치열한 경쟁의 문화 속에 놓여 있다. 최근 워라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더 많이 일해야 성공한다’는 믿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북유럽 복지국가 덴마크인의 삶을 단순히 찬양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산성과 행복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회 보고서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