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폭발적인 수요와 함께 '품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차세대 반도체 시장에서, 국내 연구진이 생산 수율을 갉아먹던 치명적 불량의 원인을 세계 최초로 밝혀냈다.
한국전기연구원(KERI) 차세대반도체연구센터 나문경 박사팀은 충남대 홍순구 교수팀, 호리바에스텍코리아와 함께 탄화규소(SiC) 전력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른바 '킬러 결함'의 내부 구조와 발생 원리를 규명했다고 밝혔다.
SiC 전력반도체는 기존 실리콘 반도체보다 10배 높은 전압과 3배의 고온을 견뎌내 '반도체계의 근육'으로 불린다. 이 반도체는 탄소와 실리콘 원자를 얇은 실로 옷감을 짜듯 한 층씩 정교하게 쌓아 올리는 '에피택시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문제는 이 촘촘한 과정에서 원자 배열이 아주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칩 전체를 버려야 하는 치명적인 불량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특히 머리카락 굵기의 10배인 약 1mm 길이에 불과한 막대 모양의 '사다리꼴 결함'은 전류의 흐름을 꽉 막아 반도체 칩을 완전히 파괴하는 으뜸 주범으로 꼽혀왔다. 그동안 학계와 산업계는 이 결함이 겉모양만 다를 뿐 일반적인 결함과 성질이 비슷할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해 왔다.
하지만 연구팀은 슈퍼컴퓨터와 고분해능 전자현미경 등 8가지에 달하는 첨단 장비와 해석 기법을 총동원해 이 1mm짜리 암초의 속내를 1년 넘게 샅샅이 파헤쳤다.
그 결과, 사다리꼴 결함 내부는 사실 최대 32층에 달하는 다수의 결함이 복잡하게 얽힌 형태였음이 새롭게 드러났다. 심지어 반도체를 층층이 쌓아 올리는 공정 중에도 이 결함이 스스로 형태를 바꾸고 주변으로 전파되며 덩치를 키운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확인했다.
반도체 불량의 근본적인 진화 과정과 발생 메커니즘을 낱낱이 파악한 이번 연구 결과는, 향후 산업 현장에서 '무결점 웨이퍼'를 대량 생산하고 양산 수율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될 전망이다.
이 같은 혁신성을 인정받아 이번 연구 결과는 금속·무기재료 분야 세계 최고 권위지인 '악타 머티리얼리아(Acta Materialia)'에 게재됐다. 심사가 깐깐해 통상 4개월 이상 걸리는 학술지임에도, 연구의 파급력을 널리 인정받아 투고 단 2개월 만에 초고속으로 게재되는 이례적인 성과를 거뒀다.
나문경 박사는 "그동안 전력반도체 성능을 저하시켰던 거대 결함의 복잡한 진화 과정을 원자 단위에서 세계 최초로 밝혀낸 뜻깊은 성과"라며 "우리나라가 고품질 SiC 전력반도체 시장을 선도하는 든든한 기술적 뼈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