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한국인 탈무드] 권세를 자산 삼은 이자겸의 몰락

화려한 저택과 휘황한 칭호로 열등감 감춰
준비되지 않은 권력의 위태로움 보여줘

역사 기록에서 위태로움을 예고하는 한자를 하나 꼽는다면 ‘취(驟)’일 것이다. ‘갑자기’라는 뜻인데, 실록에서는 소나기를 ‘취우(驟雨)’, 느닷없이 큰 부자가 된 사람을 ‘취부(驟富)’라고 기록했다. 말이 내닫듯 순식간에 비가 쏟아지거나, 뜻밖에 돈벼락을 맞는 상황을 가리킨다. 급격한 변화가 언제나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경계가 그 속에 담겨 있다.

고려 중기의 문벌귀족이자 왕실의 외척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이자겸(李資謙·?∼1126)을 서술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말 역시 “지위가 갑자기 높아졌다(驟貴·취귀)”이다. 출생 연도가 분명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음서(蔭敍) 출신인 그가 하루아침에 권세를 얻게 된 것은 둘째 딸이 16대 왕 예종의 왕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재상의 반열인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고, 예종 사후에는 열네 살의 외손자를 왕위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국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세종 때 편찬된 ‘치평요람’을 보면, 그가 권력을 장악했던 5년 동안(1122∼1126)의 정치는 뇌물과 아첨, 모함과 참소, 암살과 권력 다툼으로 점철되어 있다. 부패한 독재 체제 아래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폐단이 이 시기에 드러난다. 이자겸은 자신의 족당(族黨)을 요직에 배치하여 권력을 공고히 하였고, 자신에게 붙좇지 않는 자들은 온갖 계책과 참소를 동원해 중상모략하거나 제거하였다.



심지어 그는 대다수 신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금나라에 ‘신(臣)’이라 칭하며 사대할 것을 주장했다.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현실적 선택이라는 평가도 있으나,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굴욕 외교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이처럼 이자겸의 정치는 공적 명분보다 사적 이해가 앞섰고, 국정 운영의 기준 역시 국가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 유지에 있었다.

대부분의 권력자가 그러하듯, 이자겸 역시 영구 집권을 위해 무리한 선택을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두 딸을 모두 왕비로 들여보낸 일이다. 신라 말기의 위홍이나 고려 초의 김치양이 왕실과의 단일한 인척 관계나 사적 유대에 기대어 권세를 누렸다면, 이자겸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왕의 외조부이면서 동시에 장인이라는 중첩된 혈연관계를 만들었다. 외척이면서 다시 외척을 생산하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자신을 국왕과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리는 제도적 장치까지 마련했다. 자신의 집을 ‘숭덕부(崇德府)’라 부르고 관원을 두어 태자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으며,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칭하게 하여 전국적인 축하를 받았다. ‘치평요람’의 편찬자들은 “이자겸은 교만하고 자만심에 차 있었으나 사람들이 진심으로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권력과 부를 모두 거머쥐었지만 진정한 존경을 얻지 못한 그는 화려한 저택과 휘황한 칭호로 내면의 불안과 열등감을 감추려 했다. 늘 누군가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했던 그는 경쟁자를 참소하여 좌천시키거나 제거하였고, 오직 자식들과 자신에게 영합하는 사람들만 요직에 등용했다. 나아가 국왕 인종을 독살하려 하는 등, 신하로서의 본분마저 저버린 극단적인 행보를 보였다.

불안해진 인종은 1126년 이자겸 제거를 시도하였으나, 측근 척준경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왕궁마저 불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것이 이른바 ‘이자겸의 난’이다. 왕을 감금한 채 국정을 전횡하던 이자겸은 결국 척준경의 변심으로 체포되어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되었다.

한국사에서 이름의 뜻과 가장 멀리 살아간 인물이 이자겸인지도 모른다. 유배지 영광에서 그는 ‘굴비(屈非)’라는 이름에 끝내 굽히지 않겠다는 뜻을 담았지만, ‘자겸(資謙)’이라는 이름은 애초 겸손을 자산으로 삼으라는 뜻이었다. 그는 평생 겸손이 아니라 권세를 자산으로 삼았다. 결국 그의 몰락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진 갑작스러운 높은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