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애국자의 상징 마르크 블로크, 팡테옹 이장 엄수

소르본大 교수 지낸 저명한 역사학자
두 차례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한 용사
레지스탕스 대원 활동 중 붙잡혀 순국
마지막 순간에도 “프랑스 만세” 외쳐

프랑스가 낳은 저명한 역사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저항군) 대원이었던 마르크 블로크(1886∼1944)가 파리 시내 팡테옹에 안장됐다. 우리 국립현충원에 해당하는 팡테옹은 과학자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 부부, 소설가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철학자 장 자크 루소, 소설가 겸 정치인 앙드레 말로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위인들이 잠들어 있다.

 

23일(현지시간) AFP 통신에 따르면 이날 오후 늦게 팡테옹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주관으로 블로크와 그의 부인 시몬 블로크(1894∼1944)의 이장(移葬)을 상징하는 의식이 엄수됐다. 블로크의 무덤은 프랑스 중부의 한 작은 마을 공동묘지에 있는데, 팡테옹으로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길 원하는 유족의 바람에 따라 실제 이장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블로크 부부의 영혼을 상징하는 두 개의 관이 프랑스군 의장대에 의해 운구됐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이 23일(현지시간) 파리 팡테옹(국립묘지)에서 마르크 블로크와 부인 시몬 블로크의 얼굴 사진을 띄운 대형 구조물을 배경으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관에는 고인들이 생전에 받은 훈장, 옛 사진 그리고 자녀들과 교환한 서신 등이 담겼다고 유족은 전했다.

 

마크롱은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인 1940년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함락된 직후 블로크가 프랑스군의 패인(敗因)을 분석한 저서 ‘이상한 패배: 1940년의 증언’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블로크는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것은 물론 사고와 글쓰기를 통해서도 저항을 실천했다”고 강조했다. 1940년 같은 사태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는 듯 마크롱은 “프랑스는 어떤 일이 있어도 블로크 부부 같은 애국자들의 조국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블로크는 프랑스·독일 접경지 알자스 출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역사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을 받은 블로크는 프랑스 최고 명문대 중 하나인 파리 고등사범학교(ENS)에서 중세사를 전공했다. 오늘날 그에게는 “인류학, 경제학, 사회학을 통합하여 역사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학문적 평가가 따라다닌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블로크는 육군에 입대해 독일군과 싸웠다. 프랑스 등 연합국의 승리로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19년 시몬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시몬 또한 1차대전 당시 부상병 등을 돌보는 간호사로 참전했다. 프랑스 동부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한 부부는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뒀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이 23일(현지시간) 파리 팡테옹(국립묘지)에서 엄수된 마르크 블로크와 부인 시몬 블로크의 이장 의식에 참석해 프랑스 국기로 덮인 두 사람의 관 옆을 지나치고 있다. AFP연합뉴스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략으로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블로크는 소르본 대학교 교수였다. 53세 나이에 자녀도 6명이나 되는 블로크는 예비군 동원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복무를 간청해 다시 군인이 되었고, 얼마 안 돼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하는 치욕을 겪는다. 나치 점령 하에서 프랑스군이 사실상 해체되며 블로크는 강단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독일 치하의 프랑스에서도 유대인 탄압이 본격화했다. 교수 자리도, 자택도 모두 빼앗긴 블로크는 1943년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

 

1944년 3월 독일군에 붙잡힌 블로크는 ‘리옹의 도살자’로 불린 게슈타포 간부 클라우스 바르비(1991년 사망)의 지시에 따라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게슈타포는 블로크의 팔목을 부러뜨리고 갈비뼈를 분질렀으며 그를 찬물에 집어넣기도 했다. 1944년 6월16일 블로크는 리옹 근처 생 디디에 드 포르망의 들판에서 총살됐다. 미국, 영국 등 연합국 군대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해 프랑스 해방에 돌입한 지 열흘 만이었다. 총에 맞는 순간 블로크는 “비브 라 프랑스”(Vive la France·프랑스 만세)를 외쳤다.

 

시몬은 남편의 체포 소식을 듣고 신분을 감춘 채 리옹으로 향했다. 건강이 악화한 시몬은 현지 병원에 갔다가 위암 진단을 받고 입원했다. 남편 생사를 모르는 와중에 시몬은 수술 직후인 1944년 7월2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