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력망이 지난해 4월 대정전이 발생한 스페인보다 구조적으로 더 취약하다는 경고가 나왔다. 전력망 안정성을 저해하는 인버터(직류를 교류로 변환하는 장치) 밀도가 더 높다는 이유에서다. 이미 호남 등 일부 지역에서 스페인 대정전 원인으로 지목되는 과전압 현상 등이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전문가들은 한 목소리로 정전을 막기 위한 ‘액션’이 필요한 때라고 주문했다.
◆스페인 대정전 원인은 ‘진동’과 ‘전압 상승’
전영환 에너지전환포럼 상임고문은 24일 국회에서 열린 ‘스페인 대정전 1주년,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토론회에서 “스페인 대정전이 발생한 건 (계통에) 진동이 발생했고, 그 진동을 억제했더니 전압이 막 올라갔기 때문”이라며 “진동은 계통이 약해진 탓이고 전압 상승은 인버터의 무효전력 제어 기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진동은 발전기와 발전기 사이 전력이 앞뒤로 출렁이는 현상이다. 진동 자체는 계통에 늘 있는 현상이지만 진동이 줄어들지 않고 계속 커지면 문제가 발생한다.
스페인 정전 당시 진동을 억제하기 위해 프랑스로 내보내는 전력량을 감축하고 국내 선로를 추가 투입하는 등 전력 흐름을 줄이는 조치가 이뤄졌다. 이로 인해 진동은 잡았지만 무효전력(일을 하지 않고 전압을 유지하는 데 쓰이는 전력) 균형이 깨지면서 전압이 상승했다.
무효전력을 흡수해 전압을 조절해야 할 동기발전기(석탄·원전·LNG)는 당시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태양광·풍력에 장착된 인버터는 무효전력 제어 기능이 없어 전압 상승을 막지 못했다.
송태용 전력거래소 계통기술팀 팀장은 이와 관련해 “스페인 계통 내 전압 제어 메커니즘이 그 기능을 상실했다”며 “무효전력 자원이 급격한 전압 상승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했다”고 했다. 결국 과전압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서 보호장치가 자동으로 작동해 발전기가 연달아 계통에서 분리됐고 대정전이 발생한 것이다.
◆정전은 재생E 때문?…“계통 관리의 문제”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전력망에서도 이런 구조의 정전이 발생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는 스페인보다 우리나라 전력망이 더 취약하다는 의견도 내놨다.
전 상임고문은 “우리나라 국토 면적이 스페인의 5분의 1이고, 스페인 전체 이용 전력보다 경인 지역 사용 전력량이 더 많다”며 “인버터도 엄청나게 집중돼 있을 수밖에 없고 인버터 간 간섭 현상이 발생할 확률이 우리나라가 몇 배 더 높다”고 했다.
그 근거로 든 게 에너지 밀도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면적(10만412㎢) 대비 최대 전력수요(100.0GW)를 따져보면 ㎢당 0.996㎿로 스페인(㎢당 0.08㎿) 대비 12.45배나 되는 만큼 인버터 밀도 또한 훨씬 높다는 것이다. 전 상임고문은 우리나라 전력망에 이미 진동·과전압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우리나라에 (정전과 같은) 문제가 생겨도 ‘날벼락’이라고 할 순 없다”고 했다.
곽은섭 한국전력공사 계통기획처장은 “전력 계통 여건은 우리나라가 더 열악하다”며 “지역 간 편차가 크고 국가 간 연계선로도 없다. 스페인은 사실 계통이 잘 돼 있는 편”이라고 했다. 다른 나라와 계통이 연계된 스페인과 달리 우리나라는 계통이 외부와 단절돼 있어 비상상황에 대처할 자원이 부족할 수밖에 없단 취지다.
이런 계통 안정성 저하가 단순히 재생에너지 보급 증가 때문이란 시각에는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전 상임고문은 “재생에너지 때문에 정전이 발생했다기보다는 새 기기가 들어가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 것이고, 이를 해결하면서 발전해온 것”이라며 “재생에너지 전에도 새 기기가 (계통에) 들어오면 전압 안정성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최홍석 전력거래소 계통혁신처장은 이와 관련해 자동차와 마차가 혼재했던 1900년대 초 발생한 교통사고를 비유로 들면서 “당시 사고의 원인이 자동차 기계가 아니고, 이를 수용할 도로·신호등 관리체계와 운영기술이 문제였다”고 했다. 결국 재생에너지를 원인으로 볼 게 아니라 계통 관리를 둘러싼 요소에서 원인을 찾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단 취지다.
류필무 기후에너지환경부 계통운영혁신과장은 “전원 변화에 따라 전력망 운영에도 많은 변화가 필요해졌다”며 “변화가 이뤄지면 ‘재생에너지가 늘어서 정전이 난다’는 오해가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현 정부는 지난해 기준 37.1GW(기가와트)인 재생에너지 설비용량을 2030년 100GW로 3배 가까이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대책은 이미 나왔다…“속도가 중요”
이날 토론회에서는 계통 안정성 제고를 위해 필요한 대책으로 동기조상기 설치, 기존 인버터 성능 개량, 그리드포밍(Grid-Forming) 인버터 도입 등 제안이 쏟아졌다. 동기조상기는 발전하지 않고 무효전력 제어만 전담하는 설비, 그리드포밍 인버터는 스스로 전압과 주파수를 만들어내는 인버터를 뜻한다. 동기조상기 같은 경우 설치에 수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전문가·당국 관계자는 현 시점에서 필요한 건 이런 대책을 최대한 빠르게 이행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 상임고문은 “(대안을) 알고 있는 것과 구현하는 건 다른 문제다. 계통에 너무나 많은 사업자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무효전력 제어 능력을 인버터가 갖추게 하는 건 기술적으로 쉬울 수 있지만 정책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최 처장은 “재생발전기 건설속도는 송전망 확보 속도보다 수배 더 빠르다. 계통안정화 설비도 실질적으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며 “해결 방안은 많은 국내·외 전문가가 오래 전부터 제시해왔다. 지금은 그걸 어떻게 확보할 거냐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곽 처장도 “지금 우리 계통 상황이나 기술이 기존 제도나 정책으로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변하고 있다”며 “고도의 계통 분석도 필요하지만 의사결정이 이뤄지면 현장에서 신속하게 작동해야 한다. 결국 스피드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