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수진의시네마포커스] 안드로이드에 ‘존재’를 묻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주제는 인간관계의 허약함, 사랑하는 이의 상실과 부재가 낳은 슬픔과 고통이다. 인간은 이러한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삶의 기저부터 무너져 내리는 현실을 수용하고 붕괴된 관계를 대신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가? ‘아무도 모른다’ ‘어떤 가족’ ‘브로커’ 등에서 감독은 사회적 관계의 토대인 가족을 무대에 세우고 무너진 가족을 대신할 대안 가족의 가능성을 질문해 왔다.

‘상자 속의 양’은 이러한 질문을 뉴테크놀로지 시대의 근미래로 가져간다. 테크놀로지는 무너진 가족을 복원할 수 있는가? 2년 전 사고로 아들을 잃은 켄과 오토 부부에게 테크놀로지 기업 ‘리버스’의 제안이 온다. 아이의 디지털 데이터를 보내주면 아이와 똑같은 안드로이드를 만들어 부모의 슬픔과 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게 돕겠다는 것이다. 기계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실제 아이와 똑같은 안드로이드를 체험한 부부는 회사의 제안에 응하고 아들의 정보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를 받게 된다.

그러나 부부에게는 온도 차가 있다. 아내는 죽은 아이에 대한 애정을 안드로이드에게 쏟아붓지만 남편은 거리를 두며 안드로이드에게 자신을 아저씨라 부르게 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부부의 심리에는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남편은 안드로이드가 뛰어난 학습 능력으로 죽은 아들이 좋아했던 기차역을 줄줄 읊는 것을 보며 안드로이드에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하고 아내는 어느 순간 아이에게서 기계적 특질을 발견하면서 “그런 짓 하는 애는 내 아이가 아니”라며 거부감을 느낀다. 정밀한 기계로 연결된 안드로이드 아들의 내부를 보면서 “이 애는 괴로움이 없냐”고 오토가 질문할 때 수리사는 “마음이 없으니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건 당신의 감정이고 이 아이는 당신 과거의 산물”이라고 답한다. 이제 부부는 안드로이드 아들을 돌려보내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계약 종료이고 폐기 처분을 의미할 터이다.

재미있는 것은 엔딩을 맺는 감독의 전략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그답게도 아이들을 폐기 처분하는 것으로 끝맺지 않는다. 버려진 안드로이드들은 자신들은 인간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라 선언하면서 그들의 학습 능력을 이용해 숲속에 공동체를 건설한다. 생각해 보면 배두나가 주연을 맡은 ‘공기인형’에서도 히로카즈 감독은 어른들의 성욕 해소를 위한 공기인형에게도 ‘마음’을 불어넣어 주었다. 하물며 안드로이드에게 ‘마음’을 주지 않겠는가? 감독은 사람이든, 나무든, 안드로이드이든 지구상의 모든 존재에게 마음이 있다고 믿는 듯하다. 이것은 버려진 존재들이 새로운 관계와 공동체를 형성하는 힘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념은 사회 구조, 인간의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엄밀한 사유를 넘어서는 근본적 확신으로 굳어진다. 이 강력한 신념은 영화가 보다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의 차원으로 도약하는 데는 장애물이 되지만 뭇 존재에 대한 감독의 일관된 애정과 신념을 설파하는 데는 충분한 역할을 수행한다.

 

맹수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