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적 무기 개발 앞장 선 20세기 필름 기업들

필름과 전쟁/앨리스 러브조이/윤종은 옮김/소소의책/2만2000원

 

사진과 영화가 디지털화된 오늘날에도 일부 영화인들은 여전히 필름을 선호한다. 예를 들어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괄한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다룬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펜하이머’(2023)는 코닥 70㎜ 필름으로 촬영됐다. 그러나 코닥이라는 기업이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883년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카메라와 유리 건판을 생산하는 작은 기업으로 출발한 코닥은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성장의 전기를 맞았다. 아세테이트 필름 생산 능력은 항공기 방수 코팅 재료 수요와 맞물렸고, 이를 발판으로 1920년대 세계적 화학 기업으로 성장했다. 경쟁사였던 독일 아그파의 상황도 비슷했다. 초기 필름의 주원료였던 질산셀룰로오스는 인화성이 매우 높았고, 연소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독 가스는 전장의 화학무기를 연상시켰다. 아그파 필름 생산 공장이 1차대전 당시 독가스와 폭약 생산 기지로 쉽게 활용됐던 이유다. 예술과 추억의 매체로 여겨지는 필름은 사실은 거대한 화학산업의 일부였다.

앨리스 러브조이/윤종은 옮김/소소의책/2만2000원

2차 대전기 코닥은 자회사를 통해 하루 수백t에 달하는 고성능 폭약(RDX)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이 회사의 화학공학 역량은 맨해튼 프로젝트에도 동원됐다. 테네시주에 건설된 Y-12 공장은 거대한 전자석을 이용해 핵분열이 가능한 우라늄을 비핵분열성 우라늄과 분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렇게 분리된 핵분열성 우라늄은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에서 원자폭탄 제조에 사용됐다.

미디어 연구자인 저자는 20세기 주요 필름 기업들이 국가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며 파괴적 무기를 탄생시킨 과정을 추적한다. 역사에 휘말린 개인들의 이야기도 함께 복원된다. 우크라이나 여성 알렉산드라 라브리크는 독일 침공 이후 아그파 공장으로 강제 이송됐고, 목재 셀룰로오스에 가성소다를 붓는 작업에 동원됐다. 가성소다는 폐를 태울 만큼 강한 부식성을 지닌 물질이었고, 이 작업에 투입된 노동자들 일부는 목숨을 잃고 나머지는 극심한 후유증을 겪었다. 저자는 “오늘날에도 휴대전화와 컴퓨터 등에 들어가는 금속과 광물을 채굴하는 세계 각지 노동자들은 위험천만한 일을 하면서도 턱없이 낮은 보상을 받는다”며 “오늘날의 세계 경제는 코닥과 아그파가 사진산업에서 거대한 제국을 구축한 시기와 마찬가지로, 폭력과 불평등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