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수된 도서관에서 빛난 소명의식, 비주류를 위한 사서들의 분투…연극 ‘사사로운 사서’

왼쪽엔 서가와 대출대가 있고, 그 문을 나서면 오른쪽으로 2층까지 이어지는 널찍한 계단이 자리 잡았다. 영락없는 동네 도서관 모습이다. 대출반납일력표는 한여름 날짜를 깜빡이고, 계단 위 벽에 걸린 옛날식 벽등 너머로는 나뭇잎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영상이 번진다. 뒤편 긴 복도는 이곳이 옛날엔 고등학교였음을 보여준다. 책을 빌려주고 돌려받고 정리하며 잔잔한 일상을 보내는 서가 식구는 다섯. 고참인 자료실장 재선(이지현), 수서팀장 정윤(손지윤), 정리 담당의 중견 대영(박용우), 1년차 신참 시연(장호인), 그리고 ‘요원님’으로 불리는 사회복무요원 창현(황상경)이다.

 

도서관의 평화로운 일상은 폭우로 지하 보존서고가 침수되면서 중단된다. 우비 차림으로 뛰어든 사서들은 바삐 움직여 책을 지상으로 구해 낸다. 무대 한편 화이트보드에는 ‘보유장서 19만249권, 침수피해 10만7887권’이 적히고, 임시휴관 일차는 계속 늘어 간다. 세상 빛을 보기 힘든 처지였던 젖은 책 10만여권을 쌓아 둔 사서들의 대화에 관객은 찬찬히 빠져든다.

 

국립극단·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 공동 기획 연극 ‘사사로운 사서’는 책을 지키고 지식을 나누는 도서관 사람들의 이야기다. 모두가 ‘삶의 무가치함’과 싸워야 하는 시대라지만 자신이 택한 업의 소명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보통 사람들의 특별한 모습은 잔잔한 감동 이상의 울림을 준다.

 

침수 피해를 입은 책더미를 앞에 둔 사서들의 선택은 사실 ‘답정너’다. “이럴 땐 사람이 일일이 한 장 한 장 닦고 말려 주면 돼.”(실장) 표지는 물론 낱장 하나하나를 닦아 오염을 제거하는 수복 작업이 시작된다. 도서관만이 가진 장점도 엿보인다. 딱히 고민 없이 즉시 임시휴관에 들어가고, 책을 사랑하는 자원봉사단도 소집된다. 선풍기 바람에 책장을 말리며 나란히 앉은 사서들은 책과 도서관, 그리고 책을 빌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지하에서 옛날 누군가 감춰 둔 금지도서가 발견되면서 이야기는 한층 깊어진다.

강현주 연출은 리서치를 중시하는 극작을 직접 했다. 그만큼 사서들의 살아 있는 소명의식과 고충이 충실히 전해지며 새로운 공감을 만든다. 팀장 정윤과 중견 대영이 나누는 대화가 그렇다. “수서한 책을 인계받아 분류해 보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하셨구나 생각해요.”(대영) “그렇게 배웠어. 제일 중요한 건 중립성이라고.”(팀장)

 

제목은 “사사로운 사서”라지만 결코 사사롭지 않다. 국회에서 특정 도서 폐기를 국립중앙도서관장에게 요구하는 등 도서관 장서 선정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끊이지 않는 지금이기에 더 그렇다. 사서가 아닌 존재로서 같은 공간을 써야 하는 요원과 사서들의 실랑이 역시 생생하다. 아마도 전국 도서관에서 비슷한 풍경이 벌어질 것임을 짐작케 한다. 스마트폰만 보며 시간을 죽이던 창현은 일폭탄이 터지자 ‘보존서고 책은 사람들이 안 찾는 것’이라며 젖은 책을 버리자고 한다. 대영은 지금은 찾는 사람이 없어도 나중에 가치 있는 책일 수 있다고 답한다. “한 도서관이 장서 50만권을 가지고 있어도 보통 대출되는 책은 1만권 정도래요. 그럼 나머지 49만권은 이미 지나간 시대의 것이거나 비주류겠죠.” 그러나 그 1만권이 지금을 대표한다 해도, 다른 시대의 주역이었던 세대도 비주류인 사람들도 결국은 다 지금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장면 전환 없이 사서들의 대화로만 극이 흘러가다 보니 단조로운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책과 책을 사랑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공연 내내 관객을 붙든다. 사서의 마음이 가장 잘 전해지는 대목은 따로 있다. 지하에서 발견된 귀한 책이 복원에 성공해 다시 세상 빛을 보게 되자 사서들은 이를 소중히 보관하는 대신 아무나 읽을 수 있도록 서가 진열칸에 비치한다. 누군가에게 책을 읽는다는 건 세상에 대항하는 일이며 도서관에선 누구도 차별 없이 두려움 없이 책을 빌려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선배에서 후배로 건네지는 장면이 뜻깊다.

책을 지키고 지식을 나누는 도서관 사람들의 이야기, 연극 ‘사사로운 사서’. 국립극단 제공

공연 기간 모든 사서에게 할인 혜택이 주어지면서 20일 개막일부터 명동예술극장 매표 창구에는 자격증을 들고 온 사서들이 줄을 서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무대 위 도서관도 50여일에 걸쳐 침수 10만여권 중 7만여권을 구해 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미래형 도서관 추진 워크숍에 다녀온 팀장은 “그거 하면 서가 절반은 날려야 될 텐데, 책 다 살려 놨더니 다 버리게 생겼네”라고 한탄하고 사서들이 앉은 객석에선 웃음이 터진다.

 

인터넷에 이어 인공지능이 도래한 시대, 도서관의 미래에는 또 다른 변화가 예견된다. 책을 한 권도 버리지 않으려 한 사서들의 더딘 손길은 어쩌면 가장 비효율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한 장씩 말려 낸 그 책들이 다시 서가에 꽂히는 100분 동안 무대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객석을 향해 조용히 답을 건넨다. 지나간 것들과 찾는 이 없는 것들을 끝까지 곁에 두려는 사람들. 그 사사롭지 않은 프로페셔널리즘이, 지친 모두에게 작은 위안이 된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2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