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월드컵 축구 도전사에서 튀르키예는 빠질 수 없는 나라다. 한국이 6·25 전쟁 참화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한 1954년 스위스에서 월드컵 대회가 열렸다.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일본을 격파한 한국은 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조별 리그에선 강력한 우승 후보 헝가리를 비롯해 서독(현 독일), 튀르키예와 같은 2조에 편성됐다. 한국은 헝가리에 0-9, 튀르키예에 0-7로 잇따라 대패했다. 2조 꼴찌로 탈락이 확정된 만큼 서독과의 3차전은 해볼 것도 없이 짐을 싸 귀국해야만 했다. 이후 한국은 1986년 멕시코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32년간 월드컵 본선에 출전하지 못했다.
한국이 튀르키예와 월드컵 무대에서 다시 마주한 것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였다. 두 팀 모두 돌풍을 일으키며 세계 축구계의 예상을 뒤엎고 4강에 진출했다. 준결승전에서 독일, 브라질에 각각 진 한국과 튀르키예가 3·4위 결정전에서 격돌했다. 튀르키예는 6·25 전쟁 당시 연인원 2만1000여명의 군인을 보내 한국을 도운 ‘형제의 국가’다. 이는 미국, 영국, 캐나다 다음으로 큰 병력 규모다. 한국 응원단이 대형 튀르키예 국기를 펼쳐 든 채 두 나라를 나란히 응원한 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비록 경기는 튀르키예의 3-2 승리로 끝났으나, 그날 경기장에 ‘패자’는 없었다.
튀르키예의 강인한 국민성은 6·25 전쟁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튀르키예 부대는 수적으로 우세한 중공군과 상대하며 소총에 총검을 꽂고 싸우는 백병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쟁 기간 적군에 붙잡힌 미군 포로들은 부상 악화나 질병, 굶주림 등으로 전체의 3분 1가량이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반면 튀르키예군은 약 240명의 포로 전원이 살아서 돌아왔다. 반공(反共) 의식이 투철했던 그들은 고문과 선전 등 온갖 세뇌(洗腦) 공작을 동원한 중공군의 귀순 요구에 단 한 명도 응하지 않았다. 당시 미군 지휘부는 튀르키예 장병들의 강한 정신력에 감탄을 금치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 리그 D조에 속한 튀르키예가 1승 2패, 조 최하위 성적으로 대회를 마감했다. 호주에 0-2, 파라과이에 0-1로 연거푸 진 튀르키예는 26일 공동 개최국 미국과의 마지막 시합에 나섰다. 비록 토너먼트 탈락이 확정됐지만 튀르키예 선수들 얼굴에선 ‘이대로 무득점, 무승점으로 월드컵을 끝낼 순 없다’는 의지가 묻어났다. 경기 막판까지 미국과 2-2로 팽팽하게 맞서던 튀르키예는 주심이 종료 휘슬을 불기 직전 터진 칸 아이한(갈라타사라이SK) 선수의 ‘극장골’에 힘입어 3-2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세상에 이토록 값진 골 그리고 승점 3점이 또 있을까. 튀르키예는 ‘유종의 미’를 거두며 2026 월드컵을 명예롭게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