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예술 진흥의 책무를 짊어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 수장이 새로 선임됐다. 이범헌 전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서울 선화예고에서 홍익대 미대를 진학한 후 민주화의 염원이 불길처럼 타오르던 1987년 홍익대 학생 시위를 이끌었다. 1987년 6월28일 경찰에 연행됐다가 풀려난 다음 날 6·29선언이 발표됐다. 입시미술 지도로 생계를 잇다 다시 입학한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선 초대 학생회장도 맡았지만, ‘운동권은 아니었다’고 손사래 치는 인사다.
평생 작품 활동을 놓지 않았으면서도 미술계부터 시작해서 예술계 안팎의 현장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며 제도 개선을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던 이가 제9대 예술위원장이 된 것이다.
지난 4월 취임한 이 위원장은 예술위 나주 본부와 서울 대학로 사무실을 절반씩 오가며 체력 단련 수준으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18일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세계일보와 만난 이 위원장은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요즘 매일 느낀다”고 말했다.
―문예진흥기금 고갈이 임박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 상황과 해법은.
“가장 빠른 길은 복권기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현실적인 수준으로 키우는 것이다. 다만 입법이 필요한 사안이라, 9기 위원회가 7월 초 나주 워크숍 등을 통해 현실적 대안을 빠르게 만들 계획이다.”
나주 이전 문제도 그가 거듭 강조한 대목이다. 아르코는 전남 나주로 이전한 지 12년이 됐지만 사무동만 지어져 있다. 아르코가 본연의 활동을 벌일 수 있는 다목적 공연장이나 전시장이 없는 상태다. 그는 별도의 ‘아르코빌리지타운’을 조성해 곧 출범할 전남광주통합특별시를 ‘문화수도’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나주 이전 12년인데 아직도 안착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어떻게 보나.
“12년 차인데도 여전히 겉도는 느낌이다. 직원 절반은 나주, 절반은 서울에서 일하는 반반 체제다. 더 큰 문제는 나주 본부엔 사무동만 지어졌다는 거다. 다목적 공연장도, 전시장도 없다. 처음 설계할 때부터 잘못된 거다. 별도의 ‘아르코빌리지타운’을 만들어 아르코가 가진 콘텐츠를 통째로 옮겨 오프라인 플랫폼화해야 한다. 마침 7월에 전남광주통합특별시가 출범하는데, 그것을 계기로 ‘문화수도’로 자리매김하고 아르코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상승효과를 내야 한다는 게 내 구상이다.”
예총회장, 미술협회 이사장,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 등을 역임한 이 위원장은 오래전부터 예술행정가로서 길을 걸어왔다. 2020년 발간한 저서 제목부터 ‘예술인 복지에서 삶의 향유로’일 정도다. 미술협회와 예총에서 보낸 시간은 그에게 ‘지원받는 쪽’의 입장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이처럼 일생을 예술행정의 길로 걷게 된 것에 대해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예술행정의 길은 어떻게 시작됐나.
“처음부터 계획한 길은 아니었다. 저는 늘 문화예술 관점으로 세상을 본 것 같다. 무슨 일을 맡아도 예술가들이 장르별로 살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한국미술협회, 한국예총, 청와대 큐레이터, 여러 현장 일을 하며 생각이 쌓였다. 제 삶은 계획적이라기보다 일이 생기면 공동체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쪽이었다. 대학 시절도 그랬다.”
그의 대학 시절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전국이 민주화 시위로 뜨겁던 1987년 봄, 홍익대는 5월까지만 해도 시위에 소극적이었고 구심점이 없었다. 예술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던 캠퍼스에서 그는 학회총연합회장 자격으로 직접 나섰고, 홍대 역시 6월 격렬한 시위 현장에 앞장서게 됐다. 1988년 4학년 때 재적(在籍) 상태가 된 뒤로는 작품 활동에 몰두하면서 입시미술 지도로 생계를 꾸리며 화업을 이어갔다. 그러다 1997년 특별한 학제로 설계된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 응시했고, 시험장에 갖다 놓은 흑염소를 그리는 실기시험까지 거쳐 입학했다. 그곳에서 다시 학생회장들 추대로 초대 총학생회장을 맡아 학교에 축제와 체육대회를 처음 만들었다.
―한예종에서도 학생회 활동을 했나.
“그것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한예종은 초기라 학생문화가 거의 없었다. 교수와 커리큘럼 중심이었다. 학생들이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과제에 매달렸다. 그래서 축제와 체육대회도 만들려 하는데 음악원 교수들이 반대했다. 학생들이 공부해야 하는데 축제한다고 빼가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돌아가신 이강숙 총장께 가서 학생들이 너무 공부의 노예처럼 지내니 예술제와 체육대회를 만들어 재능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총장님은 잘 이해해주셨다. 그래서 처음으로 학생들이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행사가 만들어졌다. 한예종 초기 캠퍼스에는 과거 중앙정보부 건물 흔적도 있었다. 연못 이름이 ‘음지못’이었다. 축제 때 교수진과 함께 포클레인과 크레인을 동원해 그 비석을 연못에 수장하는 퍼포먼스를 한 적도 있다. 시대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 경험들이 제게 예술과 제도, 예술과 공동체의 관계를 생각하게 했다.”
화가였던 그가 예술행정가로 건너온 또 다른 다리는 노무현정부 시절 청와대였다. 미술품이 방치돼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청와대 총무비서관실의 제안을 받아, ‘큐레이터’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절에 대통령 집무실부터 관저, 영빈관까지 전 공간의 미술품 디스플레이를 도맡았다.
―청와대 큐레이터는 어떤 경험이었나.
“청와대 미술품은 당시 관리가 제대로 돼 있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총독부 시절부터 내려온 그림, 이승만정부 이후 들어온 작품,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들어온 공예품과 디자인 작품들이 뒤섞여 있었다. 목록은 있는데 작품이 없거나, 작품은 있는데 정보가 불분명한 경우도 있었다. 저는 공예품, 디자인 작품, 미술품 등을 분류하고 목록화하고 수장고 체계를 잡는 작업을 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현장에 내려와 “예산 들이지 않고 좋은 작품을 들이는 방법”을 묻자, 그가 제안한 게 렌털 방식이었다. 공공기관이 작가에게 정식으로 렌털비를 지급한 최초 사례로 꼽히는 이 경험은 훗날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제도로 이어졌다. 그는 기획재정부 의뢰로 정부 소장 미술품 관리체계 개선 연구도 직접 맡았다. 이 연구를 발판으로 조달청이 ‘특수물품’으로 일괄 관리하던 정부 소장 미술품의 운영·활용을 전문기관에 위탁할 수 있게 됐고, 국립현대미술관에 정부 소장 미술품 전담 체계와 별도의 미술은행 제도가 신설됐다.
2017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지내며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낼 수 있게 하는 조세물납제도를 약 10년에 걸쳐 입법으로 끌어냈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을 지내며 예술인복지법 확대에도 목소리를 더했다.
―미술품으로 세금을 낼 수 있게 한 제도를 제안하신 계기는 무엇인가.
“상속세를 현금이 없을 때 주식·채권·부동산 등 동산으로 낼 수 있게 한 조세물납법에 선진국처럼 검증된 미술품 항목을 포함하자고 제안했다. 조례 제정까지 거의 10년이 걸렸다. 시행 이후 작년에 생존 작가의 작품으로 상속세를 대신 낸 사례가 두 건 실제로 발생했다. 미술품으로 세금을 낼 수 있게 됐다는 사실 자체가, 예술품에 경제적 가치를 법적으로 부여한 상징적 사건이라고 본다. 이를 발판으로 미술품, 나아가 저작권을 담보로 한 대출 제도까지 만들고 싶다.”
―K팝과 드라마 등 K컬처가 세계적으로 성공했다. 기초예술에는 어떤 의미인가.
“K컬처가 잘된다고 기초예술도 자동으로 잘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중문화가 너무 화려하게 성공하니 그 뿌리인 기초예술은 더 안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적 감각과 사유의 뿌리는 기초예술에 있다. 문학, 미술, 음악, 무용, 연극 같은 기초예술이 있어야 다음 세대의 K컬처가 나온다. 기초예술은 기초과학과 비슷하다. 시장 논리만으로는 유지되기 어렵고 장기적 투자가 필요하다. 지금의 K컬처 흐름이 영원하다는 보장은 없다. 지속 가능한 문화강국이 되려면 다음 씨앗을 뿌려야 한다.”
이범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1963년 충북 옥천 출생 ●선화예고 미술과·홍익대 동양화과·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졸업 ●제28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장 ●2020~2024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공동의장 ●2017~2020 제24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스페인 아르코(ARCO) 아트페어 주빈국 사무국장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 ●저서 ‘예술인 복지에서 삶의 향유로’(2020), ‘예술과 생활’(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