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은 체득하는 것…최민식이 45년째 ‘육체노동자’ 자처하는 이유

연기의 신이라 불리는 그가 스스로를 ‘단련된 육체노동자’로 부르며 45년 동안 스크린에 바쳐온 고통의 총량

배우 최민식의 연기는 해석이 아닌 체득이다. 그는 대본을 분석하거나 인물의 내면을 논리적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대신 현장에 도착하는 순간 그가 맡은 인물의 흉악함이나 비루함을 자신의 몸 안에 강제로 주입한다.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뜨거운 에너지는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물의 생애를 온몸으로 앓아낸 뒤 얻어낸 육체적인 부산물이다. 대중은 최민식을 보고 연기의 신이라 부르지만 정작 그는 자신을 현장이라는 전쟁터에서 매일같이 상처 입고 다시 일어서는 단련된 육체노동자로 정의한다.

카메라가 꺼진 뒤에야 비로소 털어내는 인물의 잔상, 그가 감내해야만 했던 45년의 기록. 세계일보 자료사진

그가 스크린에서 뿜어내는 기괴한 카리스마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를 촬영할 당시 그는 살인마 장경철이라는 괴물을 연기하며 매일 스스로를 정신적인 고립 상태로 밀어 넣었다. 카메라 앞에서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마저 인물의 잔혹함으로 잠식시키는 방식이었다. 촬영이 끝난 후에도 그 여파가 가시지 않아 일상에서 불쑥 튀어 나오는 살기 때문에 멈칫했다는 그의 고백은 그가 얼마나 치열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소진하며 배역을 삼키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그는 연기를 기술적인 성취가 아닌 자기 영혼의 일부를 떼어내어 스크린에 바치는 행위로 여긴다.

연기를 넘어선 빙의의 순간들, 그는 매 작품마다 자신의 일상을 담보로 인물을 스크린으로 불러냈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 스틸컷

최민식의 45년 연기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성실함보다는 결기라는 단어에 가깝다. 1990년대 초반 주목받는 유망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려한 청춘스타의 길 대신 비주류의 세계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선택을 반복했다.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보여준 밑바닥 인생의 궁상맞은 모습이나 영화 ‘파이란’에서 건달 이강재가 보여준 비루한 사랑은 그가 자신의 모든 체면을 내려놓았기에 가능했다. 남들이 더 멋있게 보이고 싶어 할 때 그는 스스로를 덜 떨어진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몰두했다. 배역을 위해 자신의 잘생긴 외모를 지우고 그 위에 인물의 꾀죄죄한 삶을 덧입히는 작업은 그에게 더없는 예술적 탐닉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대사를 외우는 배우가 아니라 그 인물이 왜 그 말을 할 수밖에 없는지 몸으로 체현하는 배우다. 함께 호흡을 맞춘 후배들은 하나같이 최민식과의 촬영을 가장 긴장되는 순간으로 꼽는다. 그는 상대 배우가 가진 에너지의 한계치까지 밀어붙이며 현장의 공기 자체를 바꿔놓는다. 단순히 정해진 대사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감정을 극한까지 부딪치며 진짜 날것의 감정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고집은 때로 제작 현장에서 마찰을 빚기도 하지만 관객은 그 마찰에서 나오는 거친 파편들에 열광한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연기보다 울퉁불퉁하더라도 숨이 멎을 듯한 생생함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매끄러운 타협 대신 선택한 거친 파편, 그가 현장의 공기를 바꾸는 방식은 오직 온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영화 ‘파묘’ 스틸컷

최근의 행보 역시 다르지 않다. 지난 6월 26일 공개된 넷플릭스 6부작 시리즈 ‘맨 끝줄 소년’을 통해 다시 한번 경계를 허문 그는 60대의 나이에도 관객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신의 연기적 본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원초적인 현장을 찾아다닌다. OTT 플랫폼으로의 안착이나 천만 관객 영화의 성공은 그에게 부차적인 결과일 뿐이다. 그가 진정으로 갈구하는 것은 자신의 연기를 통해 관객이 스크린 속 인물의 숨소리까지 직접 느끼게 만드는 그 찰나의 희열이다. 세상이 변하고 플랫폼이 이동해도 최민식은 여전히 낡은 분장실에서 인물의 옷을 입고 거울 속의 자신을 지우며 새로운 누군가로 거듭나길 반복한다.

명예와 부를 넘어 도달한 지점, 오늘도 그는 이름 모를 관객과 마주하기 위해 거울 앞에 선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한 사람의 배우가 평생을 바쳐 깎아낸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카메라 앞에서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연기가 아니다. 자신의 시간을 인물의 삶으로 대체하고 고통의 총량을 기꺼이 짊어지며 스크린에 남기는 한 인간의 증명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종종 “관객은 나의 동지”라고 말하곤 한다. 세상은 그를 수십억원의 자산과 명성을 거머쥔 배우로 보지만 정작 그에게 남은 궁극적인 가치는 극장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익명의 관객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명예와 부를 넘어 그가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것은 인물의 진실이다. 오늘도 그는 누군가의 비참한 삶 혹은 위대한 영웅의 초상을 자신의 몸에 입히며 묵묵히 렌즈 앞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