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잡는 종탑·세상 소음 끈 기도실… 안온함과 만나다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87) 음성 감곡매괴성당

성당의 좌향, 동서로 길게 잡아
마을 어디서도 고딕 양식 한눈에
스며드는 빛으로 채운 다락 기도실
양쪽 모두 트인 회랑도 인상적

가끔 세상의 소음과 어수선함으로부터 몸의 모든 감각을 끄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종종 한적한 지방의 오래된 성당을 찾곤 한다. 미사 시간만 피하면 고요에 잠긴 성당을 온전히 거닐며 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렇게 찾아간 성당에서 낯선 이의 결혼식 하객이 되기도 한다. 토요일 한낮, 평온을 기대하며 방문했던 음성 감곡매괴성당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성당 주변은 결혼식 참석자들과 멀리서 찾아온 순례자들로 이미 버글거리고 있었다.

‘성직자 없는 교회’로 출발한 조선 천주교는 북경교구에 사제 파견을 요청했다. 그리고 1794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압록강을 건너 한양에 들어왔다. 그는 신유박해로 순교하기 전까지 6년간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아 우리말로 고해성사를 집전해 주지 못했지만, 조선 교회를 이끌며 신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중세 유럽의 신학사상과 신념체계를 가장 잘 반영한다고 생각했던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감곡매괴성당은 청미천 일대의 평야와 마을 어디에서 봐도 확연히 눈에 띄는 시각적 지배력을 구축하고 있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 이후 조선 천주교는 다시 ‘성제(聖祭) 없는 교회’가 되었다. 결국 1831년 로마교황청은 조선대목구(서울대교구의 전신)를 설정하고 사목을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겼다. 그리고 5년 뒤 피에르 모방 신부가 조선 땅에 들어왔다. 그는 훗날 조선인 최초의 사제가 되는 김대건과 두 번째 사제 최양업을 선발해 마카오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조선 땅에서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근대식 신학교를 설립했다. 그 첫 번째가 배론 신학교다(현 배론성지, 연재 74번째 글 참고). 11년간 은밀하게 운영됐던 배론 신학교는 병인박해(1866)로 폐쇄됐다. 이후 두 번째 신학교인 ‘예수성심 신학교’가 여주 부엉골에 설립됐다. 이듬해 조선과 프랑스 간에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자, 선교사들은 함벽정 터를 사들여 학교를 옮겼다. 현재 서울 용산에 있는 성심여자고등학교와 원효로 예수성심성당이 있는 곳이다. 이 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신학생 중 강도영, 정규하, 강성삼은 훗날 우리 땅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최초의 한국인 사제단이 된다.

양쪽으로 트인 회랑의 아치 프레임을 통해 바라본 성당과 옛 사제관.

예수성심 신학교가 한양으로 옮겨간 후 충청도 동북부 지역을 책임지고 있었던 카밀로 부이용 신부는 사목의 본거지를 부엉골에서 명성황후의 육촌이자 충주 목사였던 민응식의 대저택 터로 옮겼다(현 매괴고등학교와 매괴여자중학교). 1903년 완공된 ‘장호원본당’은 서양식의 화려함을 경계했던 당시 조선 교구장 구스타브 뮈텔 주교의 당부에 따라, 한옥을 변형한 ‘한양 절충식’ 형태로 지어졌다. 흥미롭게도 사제관과 본당 외 매괴학당 건물 3동이 추가로 지어졌는데, 이는 예수성심 신학교가 떠난 후에도 종교시설과 교육시설이 결합한 ‘복합단지’(Complex)로서의 성격은 유지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호원본당과 매괴학당을 짓고 30년이 채 되지 않아 신자와 학생이 크게 늘었다. 결국, 장호원본당에서 북쪽으로 200여m 떨어진 언덕 위에 매괴학교 옛 교사(1922), 감곡매괴성당(1930), 사제관(1934), 매괴학교 신 교사(1936)가 차례로 들어섰다. 1950~60년대에 옛 장호원본당과 그 주변 건물들이 헐리기 전까지, 매산 중턱에는 종교와 교육이 결합된 두 영역이 공존했다. 당시 두 영역을 합친 교세와 규모는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였다.

외부의 소란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옛 사제관의 기도실.

감곡매괴성당은 장호원본당과 달리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당시 근대 문화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던 프랑스 사제들은 18세기 고딕 양식의 부흥을 경험했고 이를 신봉했다. 그들은 고딕 양식이 중세 유럽의 신학사상과 신념체계를 가장 잘 반영한다고 믿었다. 여기에 특유의 문화우월주의가 더해지면서 우리나라에 들어선 서양식 성당들은 대부분 고딕 양식을 따르게 됐다. 성당 건축의 대명사처럼 굳어진 이러한 건축양식의 이데올로기는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감곡매괴성당의 건설을 현장에서 주도한 이는 피에르 샤잘 신부다. 1905년 입국한 샤잘 신부는 횡성 풍수원성당(1907)과 원주 용소막성당(1915)에서 중국인 기술자들과 함께 일하며 경험을 쌓았고, 이를 통해 감곡매괴성당과 인천 답동성당의 대대적인 외관 개축(연재 49번째 글 참고)을 주도했다.

샤잘 신부는 성당의 좌향을 남북으로 긴 옛 장호원본당과 달리 동서로 길게 잡았다. 이로 인해 성당 서쪽에 흐르는 청미천 일대의 평야와 마을 어디에서도 거대한 고딕 성당이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전면에 배치된 세 개의 첨탑 중 가운데 종탑은 높이 35.3m로 대구 계산성당이나 전주 전동성당의 첨탑보다 높다. 평평한 대지 위에 강력한 시각적 지배력을 구축한 것이다.

 

감곡매괴성당 남쪽에는 성당과 마찬가지로 서쪽을 바라보는 옛 사제관(현 매괴박물관)이 서 있다. 붉은 벽돌의 성당과 달리 황색조가 배어나는 회색 화강석으로 지어진 옛 사제관은 그래서 단단하고 묵직한 느낌이다. 건물 안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은 지붕창(도머·Dormer)이 있는 다락의 기도실이다. 동서남북 네 방향의 지붕창을 통해 스며드는 빛으로만 채워진 기도실에서 비로소 외부의 소음과 완벽히 차단된, 내가 원했던 정적과 안온함을 만날 수 있었다.

성당을 가운데 두고 옛 사제관 맞은편에 매괴학교 건물 두 동이 지어져 있었다. 현재 이곳에는 수녀원과 사제관, 그리고 그 사이에 중정이 들어서 있다. 옛 장호원본당과 감곡매괴성당의 맥락(Context)은 종교시설과 교육시설이 병존한다는 데 있다. 중세 성당의 특징이기도 했던 이런 맥락에서 성격이 다른 시설이 복합단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각각을 연결하면서도 경계를 지어주는 완충 공간이 필수적이다. 중세 유럽의 성당에서 이런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회랑이 있는 중정(Cloister)이었다. 감곡매괴성당에서도 현대적으로 해석된 ‘ㅁ자’ 중정과 회랑이 수녀원과 사제관, 그리고 외부인들이 방문하는 성당 사이의 물리적, 정서적 거리감을 조율한다.

중정을 가운데 두고 회랑을 한 바퀴 돌며, 이곳 시설들에 붙여진 ‘매괴’라는 단어의 뜻을 떠올려봤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묵주기도를 의미하는 ‘로자리오(Rosary)’를 ‘장미정원’ 또는 ‘장미화관’으로 이해했고, 이를 한자어인 ‘매괴(枚瑰)’로 번역했다. 그래서 감곡매괴성당은 ‘묵주의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이라는 뜻이 된다. 중세 유럽에서 장미정원(Rosarium)은 단순히 꽃을 가꾸는 화원이 아니라, 외부의 소란과 위험으로부터 격리된 ‘안전하고 고요한 닫힌 정원’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관념적인 정원이 건축적으로 구현된 형태가 회랑으로 감싸인 중정이다.

감곡매괴성당의 회랑은 한쪽이 막힌 일반적인 회랑과 달리 양쪽이 모두 트여 있다. 그래서 양쪽 영역을 시각적으로 연결하면서 동시에 중정 바깥의 번잡함을 걸러내는 ‘청각적 필터’가 된다. 중정에 서서 회랑 양쪽의 아치 프레임을 통해 붉은 벽돌의 성당과 회색의 옛 사제관을 바라본다. 이보다 더 이곳다운 장면은 없다. 순간 눈앞의 풍경이 마치 음소거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왔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