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강 첫 탈락… 그래도 의연한 일본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프랑스 월드컵 조별 리그가 한창이던 1998년 6월21일 한국 선수단이 투숙한 파리의 한 호텔에서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이 열렸다.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가 긴급 회의를 열고 그 결정 사항을 취재진에 통보했다. 조별 리그 E조 1차전에서 멕시코에 1-3, 네덜란드와의 2차전에서 0-5로 잇따라 패배한 책임을 물어 차범근 대표팀 감독을 해임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중연 기술위원장은 “멕시코와 네덜란드전 참패에 대한 책임과 대표팀 분위기 쇄신을 위해 차 감독의 해임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축구협회가 먼저 차 감독에게 사의 표명을 요구했으나 차 감독이 거절하자 해임 절차를 강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6월25일 벨기에와의 조별 리그 3차전을 앞두고 차 전 감독은 짐을 싸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30일 일본이 브라질과의 월드컵 32강전에서 져 16강전 진출이 좌절된 직후 일본 축구 팬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다. 이날 브라질은 일본을 상대로 2-1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EPA연합뉴스

“한국 축구계 전체가 진상 규명에 따라 반성할 점은 반성하고 책임을 물을 것은 물어서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해야 한다.” 2026 북중미 월드컵 32강 진출에 실패한 홍명보 전 감독을 겨냥한 쓴소리 같다. 실은 28년 전 프랑스 월드컵 직후 차범근 전 감독 징계를 요구한 이가 일간지에 기고한 글 일부다. 이에 징계 반대 의사를 밝힌 어느 축구 팬은 “차 전 감독은 자신의 축구 인생 중 (선수로서) 절반은 성공했지만 (지도자로서) 나머지 절반은 일부 실패를 겪고 있다”면서도 “우리는 그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맞받았다. 돌아보면 선수 시절의 차범근, 홍명보에 열광하며 환호를 보낸 국민이 얼마나 많았던가. 두 사람의 인생 역정은 ‘국민적 영웅’과 ‘만고의 역적’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임을 새삼 일깨운다.

 

1998년과 지금을 비교하면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 프랑스 월드컵 당시에는 모든 비난이 감독 한 사람에게 쏠렸다. 정작 감독 선임 권한을 지닌 축구협회를 겨냥한 팬들의 성토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감독과 더불어 축구협회도 뭇매를 맞는 분위기다. 어쩌면 홍명보 전 감독보다 정몽규 축구협회장을 향한 분노가 훨씬 더 압도적인 것 같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당시 1무 2패로 조별 리그 탈락이란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 든 홍 전 감독이 12년 뒤 다시 월드컵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것은 순전히 축구협회의 복마전 운영 탓이란 울분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마침 정 회장과 홍 전 감독은 대학 동문이다. 2030 세대는 이를 ‘공정’과는 거리가 먼 ‘부당 거래’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방위상(오른쪽)이 30일 인기 코미디언 야마자키 히로야(山崎弘也)와 함께 일본 월드컵 대표팀을 응원하며 SNS에 올린 사진. 고이즈미는 32강전에서 브라질에 패한 일본 대표팀을 향해 “세계 무대에서 일본 국기를 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플레이를 선보인 일본 대표팀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찬사를 바쳤다. 고이즈미 SNS 캡처

한국 시간으로 30일 북중미 월드컵 32강전 일본 대 브라질 경기가 브라질의 2-1 역전승으로 끝났다. 일본 대표팀이 애초 우승을 목표로 내건 점에 비춰보면 기대 이하의 성과임은 분명하다. 상대방이 ‘삼바 군단’ 브라질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으나 일본은 감독도, 선수도 주눅들지 않는 모습이다. 솔직히 브라질과 대결해 1-2로 아깝게 질 정도의 실력을 갖춘 팀이 지구상에 몇이나 있겠나.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郎) 일본 방위상은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글에서 “일본 대표팀 여러분, 가슴 펴고 웃는 얼굴로 돌아오세요”라며 “일본 대표팀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무슨 범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을 빠져 나가던 우리 대표팀 선수들이 눈에 밟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