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 연구총괄대표 겸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최근 세계일보 주최로 열린 ‘한강로 포럼’ 강연자로 나서 ‘신(新) 국제경제질서와 한국의 대응전략-경제안보·기술패권·공급망 재편의 시대’를 주제로 한국 경제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정 원장은 포럼에서 우리 경제가 구조적으로 직면한 도전 요소를 진단하고, 전략적 선택 방향을 제시했다. 정 원장은 미국 미시간대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조지아공과대 경제학부 교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 한국국제통상학회 부회장, 한국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 공동 회장 등을 역임했다. 강연 내용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정 원장은 지난해 8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도체 100% 관세’ 엄포와 관련해 “(일각에서) 물가가 무서워 못 때릴 것이라 하는데, 그럴 것 같지 않다”고 우려했다.
그는 “최근 삼성전자 리서치 쪽과 얘기를 해보니 마이크론이 지금 어마어마하게 공장을 짓고 있다더라”며 “그게 완성이 됐을 때를 가정해보면, 지금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반도체 슈퍼사이클을 통해 대미 흑자를 많이 누리고 있지만, 언제까지 갈 건지 모른다”고도 했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지난달 22일(현지시간) 버지니아주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메모리칩 공장에서 열린 증설 행사 연설을 통해 “이와 같은 시설(메모리칩 공장)들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반도체 관세)을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수준으로 시행하는 것”이라면서도 “즉각적으로 (반도체에) 부과될 관세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반도체 수입에 대한 전면적인 관세 도입은 당장은 아니지만,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수준으로’ 시행하겠다는 얘기인데, 정 원장은 우리 경제에 미칠 파급효과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이 필요에 의해 지금 (관세를) 안 때리는 것이지 준비는 다 돼 있고 시기를 볼 뿐이라고 보면 된다”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인공지능(AI) 열풍을 맞아 빅테크(거대 기술기업)들이 데이터센터에 수천억달러를 쏟아부으면서 AI 구동을 위한 메모리 반도체의 수요는 공급을 앞지르고 있다. 현재 최상급 메모리칩을 생산해내는 기업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 등에서 최첨단 설비를 운영하는 마이크론까지 단 세 곳뿐이다. 마이크론 측은 지난 24일 컨퍼런스콜에서 메모리 반도체 공급 부족이 내년 이후에도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면서 이에 대응해 대만과 싱가포르, 미국 등에서 추진 중인 추가 생산능력(캐파)이 2027년 중반부터 본격 가동될 것이라고 밝혔었다. 아울러 일본 히로시마에도 96억달러 규모의 공장 신설 투자를 발표한 바 있다. 산제이 메로트라 마이크론 최고경영자(CEO)도 “공급은 2028년 들어서야 점진적으로 나아질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실제로 마이크론의 미국 아이다호·뉴욕 신규 공장은 각각 내년 중반과 2028∼2030년 이전에는 공급 부족을 해소할 정도로 생산하기 어렵다는 전망도 나온다.
정 원장은 “미국이 관세를 때리면 현지 물가가 금방 올라갈 것처럼 경제학자 일부는 전망했는데 실제로 인플레이션 우려는 여전하지만, 그것(관세)보다 이란과의 전쟁 탓에 유가에서 기인한 게 크다”며 “더불어 우리나라 기업이 (미국) 관세를 맞더라도 그걸 다 소비자한테 전가할 수 있느냐 하면 못 한다. 다른 나라와 경쟁을 해야 되는 탓”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관세를) 때리는 목적과 이유는 명확하다”며 “‘한국에서 만들어놓고 수출하지 마, 미국에서 다 지어’ 그런 메시지”라고 덧붙였다.
정 원장은 더불어 미국과 중국 즉 G2(주요 2개국)를 상대로 우리나라가 일본이나 유럽연합(EU) 등 유사 입장국 또는 중견국과의 협력을 통해 관세 협상 등에서 공동전선을 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필요하긴 한데 영향력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미국의 관세 부과를 문제 삼는 나라는 없다”며 “지난번에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와 관련해 협상할 때 보면 ‘(공동 대응은) 허상이구나’라고 드러난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통상 협상 방식이 기존 다자간에서 양자 간 거래형 협정으로 바뀌고, 관리무역 성격이 강화된 여파를 그 원인으로 지목했다.
정 원장은 “협상의 기본적인 구조를 살펴보면 미국은 (전체 협상 대상국의) 모든 카드를 다 들여다보고 그걸 이용해서 양자 방식으로 압박을 하기 때문에 ‘깜깜이’인 대상국은 줄을 서게 돼 있다”며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각자도생하는 수밖에 없는데, 결국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이 되지 않나 생각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