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태는 한두 사람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 축구를 2022 카타르 월드컵 16강으로 이끌었던 ‘벤버지’ 파울루 벤투 전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북중미 월드컵 참패 이후 처음 입을 열었다. 그의 진단은 냉정했고, 처방은 분명했다. 감독 한 명, 선수 한 명을 희생양으로 삼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축구 전체가 원점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실패를 직시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벤투 전 감독은 1일 연합뉴스와 진행한 화상 인터뷰에서 “아예 처음으로 돌아가 각자의 책임을 명확히 인정하고, 1부터 10까지 원점에서 다시 돌아보며 재건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월드컵 조기 탈락 직후 한국 축구를 향해 던진 이 한마디는 어느 누구를 향한 비난보다도 묵직하게 다가왔다.
이번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은 한국 축구 역사에서도 가장 뼈아픈 실패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됐다. 홍명보 전 감독이 이끈 대표팀은 조별리그에서 1승 2패에 그치며 A조 3위로 탈락했다. 48개국 체제로 확대돼 조 3위에게도 기회가 주어진 대회였지만 한국은 32강 진출에도 실패했고, 최종 순위는 48개국 가운데 34위였다. 월드컵의 감동과 낭만 대신 ‘왜 이렇게 무너졌는가’라는 질문만 남긴 대회였다.
출발은 좋았다. 체코와의 첫 경기에서 2-1 역전승을 거두며 기대를 한껏 키웠다. 후반전 경기력은 오랜만에 한국 축구가 보여준 가장 인상적인 모습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그러나 개최국 멕시코에 0-1로 패했고, 비기기만 해도 32강 진출 가능성이 높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전마저 0-1로 무너지면서 모든 기대는 허망하게 사라졌다.
벤투 전 감독 역시 첫 경기만큼은 높은 점수를 줬다. 그는 “1차전 결과가 좋았기에 안팎의 기대가 더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나 역시 한국의 1차전 후반전 경기력을 매우 인상 깊게 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런 결과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지만, 축구에서 약팀이 강팀을 꺾는 이변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이번에는 한국이 그 이변을 겪었을 뿐이며, 중요한 것은 실패 이후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느냐”라고 역설했다.
벤투 전 감독의 말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그가 직접 한국 축구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직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그는 부임 초기부터 ‘빌드업 축구’라는 뚜렷한 철학을 밀어붙였다. 패스와 점유율을 기반으로 경기를 주도하는 방식은 익숙했던 한국 축구와는 달랐고, 그만큼 비판도 거셌다. 2019 아시안컵 8강 탈락 이후에는 전술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쏟아졌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방향을 계속 걸었다. 감독이 믿는 축구를 선수들이 믿도록 만들었고, 선수들이 서로를 믿도록 시간을 투자했다. 감독과 코칭스태프, 선수단이 하나의 경기 모델을 공유하면서 대표팀은 조금씩 자신들만의 색깔을 갖춰갔다. 그리고 그 과정은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결실을 맺었다.
당시 한국은 우루과이, 가나, 포르투갈이라는 쉽지 않은 조에 편성됐다. 우루과이와 비기고 가나에 패하며 벼랑 끝에 몰렸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포르투갈을 2-1로 꺾으며 12년 만의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이라는 역사를 썼다. 결과도 결과였지만, 강팀을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들의 축구를 펼쳤다는 점에서 많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렇다면 불과 4년 만에 무엇이 달라졌을까.
벤투 전 감독은 홍 전 감독 체제를 직접 평가하는 대신 한 단어를 꺼냈다. ‘일관성’이었다.
그는 “16강 진출의 가장 큰 동력 가운데 하나는 힘든 상황에서도 감독과 코치진, 선수단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굳건한 믿음이었다”면서 “처음 부임했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팀만의 전술적 색깔을 만들고 서로를 믿는 문화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당시에도 수많은 위기를 겪었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전을 앞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저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시간’이었다. “나는 4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한 팀을 온전히 지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떠난 뒤 한국은 대행을 포함해 4년 동안 무려 4명의 사령탑을 거쳤다.”
짧지만 강한 한 마디였다. 벤투 체제 이후 대표팀은 감독 교체와 대행 체제가 반복됐고, 감독 선임 과정마다 논란이 이어졌다. 전술적 철학도, 선수단 운영 방식도 계속 달라졌다. 장기 프로젝트는 이어지지 못했고, 결국 월드컵이라는 가장 큰 무대에서 그 불안정성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벤투 전 감독은 “대한축구협회(KFA)가 앞으로의 행보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짚어봐야 할 부분”이라며 “감독이 선수들과 신뢰를 쌓고 그들의 장점을 극대화하며 확고한 경기 방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주장 손흥민을 향해선 변함없는 신뢰를 보냈다. 조별리그 탈락 후 손흥민은 팬들에게 사과하며 다시 즐거움을 드리기 위해 뛰겠다고 다짐했지만, 벤투 전 감독은 “한 명의 선수가 팀 전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손흥민을 자신이 지도했던 선수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선수이자 최고의 프로페셔널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대표팀의 성공은 결국 시스템과 조직, 그리고 모두의 책임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월드컵 이후 팬들 사이에서 다시 ‘벤투 복귀론’이 고개를 든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일부 팬들은 벤투 전 감독 가족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찾아 복귀를 요청하는 댓글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벤투 전 감독은 이번 인터뷰에서 복귀 가능성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끝으로 벤투 전 감독은 마지막까지 특정인을 향한 책임론을 경계했다. 그는 “대한축구협회 이사회와 수뇌부 등 내부적으로 많은 변화가 뒤따를 것이라는 점은 알고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축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고민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