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가 생쥐 레미가 음식을 만드는 ‘라따뚜이’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한가롭게 채소를 손질하는 링귀니에게 그의 사수 콜레트가 매섭게 다그치며 말한다. “이건 엄마가 하는 요리와 달라!” 성별이 무엇이든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는 주부의 노고를 무시하는 발언이 아니라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조리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압박감을 강조하는 말이다. 집에서 하는 요리는 주문이 밀려드는 디너 러쉬가 없으며, 주문서에 적힌 조리법이 각기 다른 메뉴가 동시에 나갈 수 있도록 시간 조절에 힘써야 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음식을 구매한 고객의 평가에 따라 명성에 금이 가거나 운영의 성패가 좌우되지도 않는다. 이것은 업이다. 뉴욕 일류 레스토랑의 수셰프 카르멘(제레미 앨런 화이트)이 죽은 형 마이클이 남긴 샌드위치 가게 ‘더 비프’를 물려받아 재건한다는 내용의 시리즈 ‘더 베어’에는 이런 직업적 압박감이 자세하게 묘사된다.
내러티브와 미디어 콘텐츠의 좋은 점은 타인의 인생을 상상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다른 직업을 향한 상상력도 여기 포함된다. ‘더 베어’는 더럽고 허름한 샌드위치 가게든, 미슐랭 스타가 붙은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이든 음식을 조리하고 대접하는 사람들이 부엌에 모여 내는 화음과 불협화음을 여러 시즌에 걸쳐 예의주시한다. 때로는 미적 감각이나 창의성, 때로는 탁월한 재능이나 무력감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이 시리즈가 가장 끈질기게 따라붙는 것은 부엌이라는 직업적 공간, 동시에 가족적 공간에 선 사람들 각자의 얼굴이다. 동선과 초를 다투는 조리시간의 극대화된 효율을 추구하는 이 공간은 무질서한 가족의 부엌과는 얼핏 닮은 듯 매우 다르다.
프로페셔널이라는 말은 사적인 삶에서 멀어진, 엄혹하고 냉정한 무엇을 떠올리게 한다. 때로 직업정신이란 일에 임하는 동안 개인사를 얼마나 깔끔하게 접어둘 수 있는지를 가르는 지표처럼 여겨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더 베어’의 부엌에 선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 죽은 마이클이 남긴 애물단지 같은 샌드위치 가게 ‘더 비프’와 그 직원들, 카르멘과 사촌 리치를 포함한 이들의 하루는 부엌에 서 있는 동안 과거의 기억, 마이클에 대한 추억, 반쯤 미친 듯한 어머니를 향한 애증, 짜증을 돋우는 동료를 향한 분노가 몰아치는 음식 주문이라는 현실과 마구 뒤엉켜 굴러가는 꼴과 다르지 않다.
제아무리 부엌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하더라도 한 인물의 속에 담긴 복잡한 개인사는 매끈하게 정돈되지 않는다. ‘더 베어’의 직원들은 오늘도 직업정신으로 중무장한 채 부엌에 서지만 과거로부터의 부채감과 미완성된 애도는 멈추지 못한다. 이들은 전문가 집단이면서 자기 삶에 서툰 사람들이기에 애틋하다. 가족의 성에서 따온 이 레스토랑의 이름은 문득 저들을 한계로 몰아넣는 야수이자 어깨에 짊어진 삶의 인고를 동시에 의미하는 것만 같다.
유선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