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실의 시대, 한 여성이 남긴 ‘불멸의 성찰’

한나 아렌트/ 린지 스톤브리지/ 손성화 옮김/ 사람in/ 2만8000원

 

“1962년 3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스산한 날, 한나 아렌트는 뉴욕의 한 병원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긴 채 천장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날 그녀가 타고 있던 택시가 센트럴파크를 지나는데 트럭 한 대가 와서 충돌하는 바람에 얼굴과 치아가 엉망이 됐고 갈비뼈 아홉 개가 부러졌다. 트럭이 어쩌다가 택시를 들이받았는지, 자기 몸이 어떻게 그토록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는지 아렌트는 경위를 알지 못했다. 최근에 들인 습관대로, 차를 타고 이동하는 얼마간을 귀한 독서 시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던 탓이다. 각종 단어가 울려퍼지는 소리로 가득했던 그녀의 머릿속은 일순 어두워졌다.”

 

한해 전 ‘뉴요커’를 대신해 예루살렘에서 나치 간부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취재한 한나 아렌트는 직후에 뉴욕에서 이 같은 끔찍한 교통사고를 겪게 된다. 사고 발생 1년 뒤인 1963년 봄에야 아이히만 재판에 관한 다섯 편의 기사를 ‘뉴요커’에 게재할 수 있었다. 이 기사들은 나중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책을 통해 ‘악의 평범성’이라는 놀라운 통찰을 제공한 아렌트는 권력과 테러, 전쟁과 혁명, 망명과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에 대해 글을 썼던 20세기 대표적인 사상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린지 스톤브리지/ 손성화 옮김/ 사람in/ 2만8000원

영국 버밍엄대 교수이자 영국 학술원 회원인 저자는 바로 한나 아렌트가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사유하는 삶을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귀르스수용소를 탈출해 프랑스 몽토방에서 체류하던 시기, 뉴욕 어퍼웨스트사이드 아파트의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타자기로 원고를 집필하던 때까지 아렌트의 삶과 지적 작업을 생생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복원한다. 그리하여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탈진실과 고립의 시대에 한 시민으로 고민하고 사유하는 의미를 깨우치게 한다.

“아렌트는 정체성보다 당혹감을 가치 있게 여겼다. 스스로를 위해, 또 빈번하게는 자신에게 맞서서 사유하는 것이 그녀의 시금석이었다. 아렌트가 말하는 사유는 계몽주의적인 서늘한 이성이 아니라 성찰, 질문, 당혹감(칸트의 지성)이 거듭되는 활동을 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