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는 6·25 전쟁이 터지기 한 해 전인 1949년 4월15일 경남 진해의 옛 덕산 비행장에서 창설됐다. 당시 국방부는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리적 여건을 감안할 때 상륙작전을 수행할 부대가 필요하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출범 당시 해병대는 해군에서 넘어 온 장교 26명과 부사관 54명, 병 300명 등 380명으로 구성된 대대급 소부대였다. 초대 사령관(신현준)의 계급도 중령에 불과했다. 3만명 가까운 병력을 거느리고 3성장군(중장)의 지휘를 받으며 ‘준(準)4군 체제’의 일원으로 거듭난 오늘날의 해병대사령부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6·25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서울대 법대와 해군사관학교에 나란히 합격한 청년이 있었다. 나라가 망할 뻔한 전란을 똑똑히 목격한 그는 ‘조국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 아래 법조인 말고 군인의 길을 택했다. 1957년 해사(11기) 졸업 후 해병대 소위로 임관한 청년은 서해 최전방 백령도를 지키는 해병 부대 소대장으로 장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5년 당시 박정희정부는 해병 2여단의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했다.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던 그는 결연히 파월 청룡부대 1진 참여를 자원했다. 고(故) 이인호 해병 소령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월남전 참전 기간 이 대위는 청룡부대 3대대 중대장과 대대 정보장교 등을 맡아 최전선에서 싸웠다. 1966년 8월 이 대위가 이끄는 장병들은 베트남 남동부 투이호아 일대의 베트콩 은신처 수색 작전에 투입됐다. 베트콩이 숨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동굴 안으로 이 대위와 부하들이 막 진입했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동굴 안쪽에서 적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이 대위는 “수류탄이다, 엎드려!”라고 외친 뒤 몸을 던져 수류탄 위를 덮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처참한 상황이었다. 판검사도 마다하고 군복을 입은 35세 청년은 그렇게 장렬하게 전사했다.
2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이달(7월)의 호국 인물’로 선정된 고인을 기리는 선양 행사가 열려 부인 이경자(87)씨 등이 참석했다. 정부는 자신을 희생해 부하들 목숨을 구한 고인에게 1계급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베트남에서 한국군과 어깨를 겯고 싸우던 미국 정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66년 11월 방한 중이던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고인을 대신해 이씨에게 직접 은성무공훈장(Silver Star Medal)을 전수했다.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두 자녀를 키운 이씨의 노고를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하다. 부디 무병장수하시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