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숨 쉬는 샌프란시스코!”… 억만장자가 도심에 ‘거대 누드상’ 세운 진짜 이유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R-에볼루션부터 흰긴수염고래 울음까지

엠바카데로를 통째로 바꾼 야외 미술관

100여년전 대지진 버틴 페리 빌딩 

미쉐린 맛집과 파머스 마켓으로 부활

“워억! 워억!” 피어39에선 바다사자 환영

피셔맨스 워프선 던지니스 크랩이 유혹

 

R-에볼루션.

거리를 걷는다. 한낮의 눈부신 햇살을 받아 은빛 윤슬로 부서지는 바다를 즐기며. 허공을 가르며 시원하게 뻗은 베이 브리지는 예바 부에나 섬을 가만히 끌어안고. 그 앞을 미끄러지듯 지나는 새하얀 유람선은 한 마리 새처럼 날렵하다. 거리로 고개를 돌리면 야자수를 따라 늘어선 거대한 설치작품들. 숨을 쉬듯 심장이 움직이는 여인부터 깊은 울음을 토해내는 흰긴수염고래까지.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지는 거대한 야외 미술관, 샌프란시스코 엠바카데로 거리에 섰다.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소연 기자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소연 기자

 

 

◆줄 서는 인증샷 명소 R-에볼루션

 

레스토랑과 상점이 몰려 있는 역사적인 명소 페리 빌딩 바로 앞 엠바카데로 광장에 서면 누구라도 걸음을 멈추게 된다. 13.7m, 4층 건물 높이에 달하는 거대한 나체 여성 조각상이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다. 조각가 마코 코크란의 작품 ‘R-에볼루션(R-Evolution)’이다. 스테인리스 스틸 메시로 정교하게 짠 몸체는 가까이서 보면 그물처럼 비어 있지만 멀리서는 살갗처럼 매끄럽게 보인다. 더 놀라운 건 내부에 장착된 모터. 하루에 한 시간씩 가슴 부분이 천천히 오르내리며 실제로 숨을 쉬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다.

 

2015년 미국 네바다사막의 축제 ‘버닝맨’에서 처음 공개된 이 작품이 지난해 4월 엠바카데로에 자리 잡자 논란도 함께 따라왔다. 시 정부가 노숙자 문제와 도심 공동화 등 시급한 현안을 젖혀두고 거대한 누드상에 공을 들인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또 주거지와 관광객이 밀집한 공공장소에 나체 형상을 세운 것이 부적절하다는 지적과 함께, 남성 작가의 시선으로만 해석된 누드라는 비판도 일었다.

 

R-에볼루션.
R-에볼루션 야경.

사실 이 작품은 시 정부가 아니라 시브란디 재단이 샌프란시스코 도심 활성화를 위한 대형 공공 예술 프로젝트 ‘빅 아트 루프(Big Art Loop)’ 사업의 일환으로 설치됐다. 이 재단은 IT 기업 깃랩의 공동 창업자인 억만장자 시드 시브란디 부부가 설립한 민간 가족 재단이다. 코크란은 여성의 당당함과 주체성을 표현한 대형 메탈 메시 조각상 시리즈 ‘더 블리스 프로젝트(The Bliss Project)’ 3부작으로 유명하며  블리스 댄스(Bliss Dance·2010), 트루스 이즈 뷰티(Truth is Beauty·2013)에 이어   R-에볼루션은 세 번째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이 여성의 존엄성, 강인함, 해방을 상징하며 성적으로 대상화되지 않은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설명한다. 작품의 모델은 샌프란시스코 베이 출신 인디 싱어송라이터이자 댄서인 데자 솔리스로, 3부작의 포즈는 그가 직접 결정했다.

 

블리스 댄스. 홈페이지

 

 

트루스 인 뷰티. 홈페이지

이 작품은 원래 유니언 스퀘어에 설치될 예정이었으나 14.5t에 달하는 무게 때문에 광장 바닥 타일 파손이 우려돼 엠바카데로로 위치가 변경됐다. R-에볼루션은 이처럼 많은 논란이 있지만 페리빌딩, 바다와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 설치 이후 하루 수천명의 관광객이 찾는 샌프란시스코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이에 애초 6개월이던 전시기간도 연장됐으며 오는 10월 초 철거될 예정이다.

 

코퍼스.

‘엠바카데로(Embarcadero)’는 스페인어로 부두, 선착장이라는 뜻으로 샌프란시스코 동쪽 해안선을 따라 수많은 부두를 하나로 연결하는 해안 산책로가 이어진다. 페리빌딩을 중심으로 북쪽은 홀수, 남쪽은 짝수 번호가 붙으며 주요 부두마다 빅 아트 루프 사업으로 설치된 작품들이 즐비하다. 피어14 초입에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작품이 기다린다. 텍사스 출신 작가 마이클 크리스천의 ‘코퍼스(Corpus)’다. 라틴어로 ‘몸’을 뜻하며 인간의 신체와 공동체를 동시에 상징하는데, 멀리서 보면 조개나 게, 문어를 닮은 정체불명의 해양 생물체가 막 바다에서 기어 올라온 듯하다. 버려진 철재를 용접해 만든 다리 사이로 여행자들이 통과하며 사진을 찍는 모습은 이제는 익숙한 풍경이 됐다. 현지에서는 ‘외계인 우주선’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에코스–미지의 바다에서 온 목소리.

 

 

에코스 야경.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페리빌딩 남쪽 출입문 광장에 설치된 오스트리아 작가 마티아스 그마흘의 ‘에코스–미지의 바다에서 온 목소리’가 시선을 붙잡는다. 생후 1년 된 흰긴수염고래의 실제 크기를 본떠 만든 갈비뼈 형상의 작품으로 파란색, 초록색, 미색의 나무 패널이 심해의 빛을 닮았다. 가까이 다가서면 고래의 울음소리가 신비롭게 흘러나오지만,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경고음과 함께 음악이 뚝 끊긴다. 인간이 자연을 침범할 때 자연이 침묵하는 방식을 은유한 장치다. 해가 지면 어둠속에서 영롱하고 신비한 빛을 낸다.

 

코랄리.

페리빌딩 북쪽 출입구인 피어1½ 앞에서는 인어조각상 ‘코랄리(Coralee)’가 바다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자태를 뽐낸다. 뼈대와 몸체는 폐금속과 버려진 철재를 용접했고 인어의 몸, 꼬리, 바닥의 물웅덩이를 장식하는 알록달록하고 영롱한 비늘은 버려진 유리병 등으로 만들었다. 원래 2022년 영국 ‘버닝맨 공공 예술 전시’를 위해 처음 제작됐으며 당시 영국 어린이들이 직접 모은 유리병을 깨끗이 씻어 모자이크처럼 붙인 사연이 더해지며, 해양 환경보호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으로 사랑받는다. 영국 피크 디스트릭트에 전해지는 고대 인어 설화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됐다. 낮에는 햇빛을 받아 유리가 보석처럼 반짝이고, 밤에는 산책로의 조명과 어우러져 엠바카데로에서 가장 아름다운 포토존으로 손꼽힌다.

 

갓 프레임드.
피어7 목재 다리.

피어7 앞으로 가면 황금빛 대형 액자 ‘갓 프레임드(Got Framed)’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푸에르토리코 출신 작가 니노 알리시아가 만든 높이 3.6m 작품은 액자 안에 들어선 사람과 배경을 그대로 한 폭의 작품으로 만들어준다. 바다를 등지고 서서 작품을 바라보고 셔터를 누르면 액자 안에 야자수 대로, 클래식한 노면 전차 뮤니 스트리트카, 초현대적 랜드마크 트랜스아메리카 피라미드 등 빌딩 숲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담긴다. 반대로 서면 샌프란시스코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최고의 아날로그 감성으로 중무장한 목재 다리를 품는다. 바다를 향해 약 250m가량 곧게 뻗은 다리는 클래식한 주물 가로등, 철제 난간, 벤치가 19세기 감성을 자아내 카메라만 대면 빨려 들어갈 듯한 깊이감 있는 풍경이 연출된다. 바닥 전체가 두껍고 거친 천연 목재 널빤지로 마감된 다리는 1990년대 후반 전 세계 스케이트보더들이 몰려와 묘기를 선보이던 스트리트 문화의 아이콘 같은 장소였다.

 

펄스 포털.

피어27 앞에 설치된 약 6m 높이 아치형 빛 조각상 펄스 포털(Pulse Portal)은 데이비스 맥카티의 작품이다. 2016년 버닝맨 축제 때 상징적인 관문 역할을 한 이 작품은 미국 나사가 개발한 다색성 플렉시글라스 패널로 덮여 보는 사람의 위치, 각도, 햇빛 세기에 따라 조각상의 색상이 끊임없이 변한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브리지.

◆100년 세월 담은 페리 빌딩

 

엠바카데로 산책로에서 바다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베이 브리지가 장쾌하게 펼쳐진다.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를 잇는 다리는 중간에 자리한 예바 부에나 섬을 관통하며 터널로 이어진다. 섬 바로 북쪽에는 1939년 만국박람회 때 인공으로 매립해 만든 쌍둥이 섬 트레저 아일랜드가 붙어 있으며 다리와 섬, 그 위로 흐르는 구름까지 더해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완성한다.

 

피어3 부두에는 ‘샌프란시스코 벨’호가 정박해 있다.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서 가장 큰 럭셔리 디너 크루즈 유람선으로, 19세기 미시시피강을 오가던 외륜선 스타일을 본떠 화려하게 꾸몄다. 4개 층에 최대 1500명을 태울 수 있는 이 배는 피어3을 출발해 베이 브리지 아래를 지나고 알카트라즈 섬을 거쳐 금문교 인근까지 다녀오는 낭만적인 코스로 운항한다. 평소엔 부두에 조용히 떠 있다가 예약된 일정이 잡히면 밧줄을 풀고 바다로 나간다. 특히 매년 10월 열리는 미국 서부 최대 규모의 해상 항공 축제 ‘플리트 위크 에어쇼’ 때는 정원을 가득 채우고 바다 한가운데 명당자리를 잡는다.

 

페리 빌딩.
페리 빌딩 블루보틀.

산책로의 시작점이자 엠바카데로의 랜드마크는 역시 페리 빌딩. 1898년 7월 문을 연 이 건물은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의 지랄다 종탑을 본뜬 75m 높이의 시계탑이 상징이다. 골드러시 시대부터 베이 브리지와 금문교가 들어서기 전까지 하루 통근자 5만명이 오가던 도시 제1의 관문이었고, 1906년 대지진과 1989년 로마 프리에타 지진도 견뎌낸 생존의 건물이다.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 ‘소렐’의 알렉스 홍 셰프가 문을 연 ‘아르켓’을 비롯해 호그 아일랜드 오이스터, 아크메 브레드 컴퍼니, 블루보틀 커피 등 입맛을 사로잡는 맛집들이 복도를 가득 채운다. 토요일이면 빌딩 앞 광장에서 유기농 농산물과 다국적 길거리 음식이 넘쳐나는 페리 플라자 파머스 마켓이 열려 활기를 더한다.

 

피어39 바다사자.

◆바다사자·회전목마 만나는 피어39

 

“워억! 워억!” 샌프란시스코 최고의 명소 피어39로 들어선 뒤 낯선 울음소리를 따라가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플로팅 도크 위에 바다사자 수백마리가 낮잠이나 헤엄을 즐기며 여행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기 때문이다. 로마 프리에타 지진 직후인 1990년 1월부터 바다사자들은 포식자의 위협을 피할 수 있고 먹이도 풍부한 K도크에 무리지어 정착했다. 봄철 번식기에는 1000마리 이상이 도크 위에서 햇볕을 쬐며 울음소리를 내는 장관이 펼쳐진다.

 

피어39 회전목마.
피셔맨스 워프 조타 키 모양 네온사인 간판.

부두 끝자락엔 이탈리아에서 수작업으로 만든 2층 회전목마가 자리하고, 투명한 언더워터 터널로 해양 생태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아쿠아리움도 있다. 해산물 맛집 포그 하버 피시 하우스에 앉으면 베이 브리지와 바다사자 도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피어39와 맞붙은 피셔맨스 워프는 골드러시 시대 이탈리아계 이민자 어부들이 정착하며 시작된 항구 지구. 제퍼슨 스트리트와 테일러 스트리트 교차로의 거대한 선박 조타 키 모양 네온사인 간판 아래로 게와 새우를 삶아 파는 가판대가 줄지어 있다. 던지니스 크랩 숙회와 칵테일 새우가 인기. 1849년부터 이어온 부댕 사워도 팩토리 본점에서는 통유리창 너머로 제빵사들이 게와 거북이 모양 빵을 만드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