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개헌 블랙홀 향해 다가가는 일본

아베 유산 계승한 다카이치 총리
긴급사태 등 ‘단계적 개헌’ 속도전
개정 가능성 큰 조항부터 ‘손질’
전쟁 포기 ‘9조’ 수정 가능성 우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회고록 앞부분에 코로나19 초기 대응 당시 어려움을 토로하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아베 2차 내각은 ‘관저 1강’이라 불릴 정도로 강한 정부였는데도 관료 사회는 위기 대응 사령탑이었던 총리관저에 협조하지 않았고, 2012년 제정된 ‘신종 인플루엔자 등 대책 특별조치법’이 지방자치단체에 많은 권한을 넘긴 탓에 중앙정부의 통제가 각 지역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후생노동성 간부들로부터는 ‘절대로 책임을 지지 않겠다’라는 강한 의지를 느꼈다”며 분노했고,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는 비상사태에 정부가 국민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는 법제를 갖추고 있다”며 일본의 법체계를 아쉬워했다.

이때의 경험은 일본 보수 정치권의 개헌 논의와 연결된다. 집권 자민당이 추진 중인 4가지 개헌 항목 중 하나가 긴급사태 조항 신설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본격화한 이 주장은 코로나19,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을 거치며 증폭됐다. 대규모 자연재해나 감염병 대유행, 테러·내란·전쟁 등 안보 위기가 발생했을 때 의회 권능을 초월하고 국민 기본권도 제한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정부에 줘 집중 대응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유태영 도쿄 특파원

아베 전 총리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하는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지난 2월 중의원(하원) 선거에서 역대급 승리를 거두고 개헌 의지를 강하게 밝힌 후 급물살을 타고 있는 개헌 논의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중의원 헌법심사회는 4월부터 지난달 말까지 거의 매주 열렸고, 연립 여당인 자민당과 일본유신회는 긴급사태 조항의 조문화를 위한 작업에도 착수한 상태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패전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점령기에 만들어진 일본 헌법에 긴급사태 조항이 없는 것은 군국주의 시기의 이른바 ‘대일본제국 헌법’하에서 계엄이나 긴급칙령 등이 국내외에 끼친 악영향을 고려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최근 논의의 최대 쟁점이 되는 것은 긴급사태 발생 시 중의원 임기가 만료되면 어떻게 하느냐다. 여권은 선거를 연기하고 임기를 연장하는 방안을 주장하고 있다. 긴급사태 조항의 핵심은 정부 권한 확대인데, 권력의 오·남용 가능성을 사전 차단·사후 통제하는 안전장치 논의보다 의회 권력구조 문제를 우선시하고 있는 셈이다.

또 하나 논의에 속도가 나고 있는 개헌 조항은 참의원 선거구 합구 해소이다. 인구가 적은 지역의 유권자 의사가 과다 대표되는 현상을 막기 위해 돗토리·시마네현, 도쿠시마·고치현을 각각 하나의 선거구로 조정했는데, 막상 시행해 보니 지역 대표성이 약화해 이를 원상 복구하자는 것이다.

최근 일본의 개헌 논의가 이 두 가지에 집중된 것은 국내외적 거부감이 큰 제9조 대신 상대적으로 개정 가능성이 큰 조항부터 손을 대 개헌의 물꼬를 트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여전히 여소야대인 참의원에서 야권의 협조를 얻기에도 수월하다.

문제는 이를 고리로 개헌 흐름이 형성되면 ‘전쟁 포기, 전력 미보유’를 규정한 9조를 고치려는 논의에도 탄력이 붙을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일본은 전후 금기시했던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와 살상무기 수출의 빗장도 풀었다.

특히 자민당의 연정 상대가 우파 성향이 강한 일본유신회로 바뀐 점은 9조 개정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더 키운다. 유신회는 자위대를 헌법에 명기하자는 자민당 안보다 더 나아가 9조 2항(전력 미보유) 삭제와 국방군 창설을 주장하고 있다.

한 달쯤 전 만난 일본 기자에게 ‘이러다 진짜 개헌하는 것 아니냐’고 질문하자 그는 “한국은 어떠냐”라고 되물었다. 서울특파원 시절 한국의 개헌 논의를 수차례 지켜봤지만 번번이 무산됐듯 일본도 이러다 말 것이라는 투였다. 그는 “9조 개정은 특히 문턱이 높다”며 “개헌 주장은 보수 지지층을 잡기 위해 으레 하는 얘기일 뿐”이라고 했다.

과연 그런가. 상대적으로 쉬운 조항부터 개정의 선례를 만들려 하면서, 모든 이슈를 빨아들인다는 개헌 블랙홀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국민투표법 개정안도 최근 중의원을 통과해 개헌을 위한 절차는 이미 정비가 완료되기 직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