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지난달 26일(현지시간) 강제노동 결부 상품 금지 규정(FLR)의 이행 가이드라인을 공개하고, 단일 포털(Forced Labour Single Portal)을 출범시켰다. 오는 2027년 12월14일 전면 시행되는 이 규정은 특정 지역이나 품목을 지정하지 않고, 원재료 채굴·생산 단계부터 완제품에 이르기까지 공급망 어느 단계에서든 강제노동이 확인되면 원산지를 가리지 않은 채 해당 제품을 EU 시장에서 퇴출한다. 이뿐 아니라 어느 지역의 어떤 품목이 위험한지 보여주는 데이터베이스도 이 포털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미국은 이미 2022년 6월 위구르강제노동방지법(UFLPA)을 시행해 중국 신장에서 생산됐거나 신장과 연결된 원재료가 포함된 제품의 수입을 사실상 금지해왔다. EU는 UFLPA 시행 직후인 2022년 9월 유사한 규정을 제안했고, 대상을 신장으로 한정하지 않고 전 세계로 넓혔다. 작동 방식은 다르지 않다. 원재료 단계까지 거슬러 강제노동을 추적한다는 원리는 같다. 이제 미국과 유럽 양대 시장 모두 공장이 아니라 원재료를 규제 기준으로 삼게 됐다.
강제노동은 대개 완제품이 조립되는 공장이 아니라 원재료가 채굴·생산되는 이전 단계에서 일어난다. UFLPA 집행 결과가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국 관세국경보호청(CBP)이 UFLPA 시행 후 억류한 수입품을 원산지 기준으로 집계한 결과 금액 기준 1위 국가는 중국이 아니라 말레이시아였고 베트남과 태국이 그 뒤를 이었다.
공급망 분석기업 알타나(Altana)의 분석에 따르면 2022년 7월∼2025년 6월 억류된 전자제품은 31억달러어치로 전체 억류액의 약 90%에 달했지만, 이 가운데 중국에서 직접 선적된 물량은 사실상 없었다. 예를 들어 신장산 폴리실리콘은 동남아시아로 건너가 부품과 완제품이 되는데, 억류가 완제품 생산지인 동남아에 집중된 결과는 당연해 보인다. 2024년에는 완성차 기업 폭스바겐이 공급망에서 미국 제재 대상 기업과 연결된 부품을 뒤늦게 발견해 교체하느라 미국행 통관을 스스로 보류한 바 있다.
이러한 흐름에 민감한 한국 기업의 대응 역시 주목받고 있다. 한국 기업은 2018년부터 촉발된 미·중 무역전쟁 후 고율 관세를 피해 생산기지를 중국에서 동남아로 옮겨왔다. 삼성전자는 2019년 중국 내 마지막 스마트폰 공장을 닫고 베트남으로 옮겼고,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은 인도네시아에 합작 배터리 공장을 세웠다. 관세 리스크 대응을 위해 옮긴 이 결정이 최근 강제노동 리스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동남아는 강제노동 리스크를 가장 많이 안은 지역으로 분류된다. 국회미래연구원은 지난달 발간한 보고서 ‘국제질서의 전환과 아세안’에서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경제를 중국산 중간재를 들여와 조립·가공해 미국과 유럽으로 내보내는 ‘커넥터 경제’로 규정하고 있다. 보고서는 아세안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 확대가 수출과 함께 중국산 중간재 수입도 동시에 늘린다며 아세안의 부상이 중국 의존도 축소인 동시에 중국 공급망의 역외 확장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고 진단했다. 미국 역시 이런 점을 이유로 지난해 UFLPA 집행 대상을 인도네시아와 한국 등으로 넓히고, 리튬을 새 고위험 품목으로 지정했다. 이는 인도네시아에 배터리 공장을 세운 한국 기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규제는 지금도 강화되고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2일 강제노동 제품 수입금지 제도를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국과 베트남을 포함한 60개 경제권에 무역법 301조에 근거한 추가 관세를 예고했고, 제도를 도입·이행한 일부를 뺀 한국·베트남 등 54개 경제권에는 12.5%를 책정했다. 여기에 원산지를 가리지 않는 EU 규정이 2027년 시행되면, 동남아산 제품에 대한 조사는 더 늘어날 수 있다.
기업의 대응은 공급망 관리의 기준을 공장에서 원재료로 옮기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과거에는 원산지 증명서가 통관의 핵심 서류였지만, 이제는 원재료의 채굴·생산 단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추적 기록이 요구된다. EU 규정은 별도의 실사 의무를 새로 부과하지는 않지만, 성실한 실사의 이행 여부를 조사 개시와 결과 판단에 반영하도록 설계했다. 따라서 EU가 포털을 통해 공개하는 위험 데이터베이스에 자사 공급망이 지나는 지역과 품목이 포함되는지 확인하는 상시 점검도 필요하다.
최근 국제무역 통관의 기준이 ‘어디서 만들었는가(Made in)’에서 ‘무엇으로 만들었는가(Made from)’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원재료의 출처를 증빙하지 못하는 제품은 생산지와 무관하게 미국과 EU 시장 진입이 제한된다. 세계 최대 무역국가 중 한 곳인 한국 정부와 기업에는 생산기지의 위치보다 그 공장에 어떤 원재료가 들어오는지 추적하고 입증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역량이 새로운 성공 관건으로 떠올랐다.
박예은 UN SDGs 협회 선임 연구원 unsdgs@gmail.com
*박 선임 연구원은 현재 글로벌 전략 컨설팅 펌 피어스베일(PierceVale) 선임 매니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