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를 강타한 연쇄 강진 발생 이후 열하루가 지나면서 구조 작업이 사실상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법의학 체계가 수용 한계를 훌쩍 넘어서면서 시신 보관과 신원 확인에 어려움을 겪자 당국은 신원 미상 시신의 매장을 시작했다.
5일(현지시간) AFP통신과 BBC, 가디언 등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북부 라과이라주 라 에스페란자 공동묘지에는 이날 끝내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 150여구가 개별 무덤 형태로 한꺼번에 매장됐다. AFP는 현장에서 굴착기 두 대가 계속해서 새 무덤을 파고 있었고, 이미 조성된 묘지에는 흰 나무 십자가와 꽃다발이 놓였다고 전했다. 십자가에는 이름 없이 사망일만 지진이 발생한 6월24일로 표시됐다.
이번 매장은 시신 보관 체계가 사실상 붕괴한 데 따른 조치로 보인다. 지진 직후 병원 영안실은 곧바로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이후 수습된 시신들은 라과이라 항구에 마련된 임시 보관소로 옮겨졌다. 그러나 항구에서 민간 기부로 운영되던 냉동 창고마저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면서 이후 수습된 시신은 비닐에 싸인 채 땡볕 아래 놓이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BBC는 “시신 부패가 빠르게 진행돼 항구 시설에 강한 악취가 퍼지고 있고, 가족들은 손이나 헝겊 마스크로 입을 막은 채 시신 확인을 하고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신원 확인도 난항을 겪고 있다. 유가족들은 수시간씩 줄을 선 뒤 모니터에 띄워진 1000장 이상의 시신 사진을 일일이 넘겨보며 가족을 찾아야 한다. 상당수 시신은 부패와 외상으로 얼굴 식별이 어려워 문신, 팔찌, 옷가지, 담요 같은 단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60세 여성 리리아나 곤살레스는 먼지가 묻은 담요를 통해 37세 조카를 알아봤다며 이 상황이 “마치 공포 영화 같다”고 BBC에 말했다. 현장에서 일하는 법의학자 조엘 미라발(45)은 “수습된 시신 중 신원을 확인해 줄 유가족이나 이웃이 있는 경우는 60∼70% 정도이며 그마저도 쉽지 않다”면서 “희생자들의 생전 모습이 10%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시신의 신원이 확인돼도 비용 문제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경우도 잇따르고 있다. 25세 경비원 호세 안토니오 톨레도의 시신은 붕괴한 건물 잔해 아래에서 수습된 뒤 병원, 시설을 떠돌다 야외주차장으로 옮겨졌다. 며칠 뒤 가족이 신원을 확인했지만, 장례비용 450달러(약 60만원)를 마련하지 못해 곧바로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그의 가족은 이후 지역 공동묘지의 무료 매장 공간을 제공한다는 시의 연락을 받고서야 한 시간 만에 공동묘지로 가서 장례를 마쳤다.
현장 혼란이 커지면서 유가족들 사이에서는 신원 확인 없이 시신이 집단으로 매장될 수 있다는 공포도 확산하고 있다. 집단 매장 공포를 조장하는 허위·조작 영상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유포되기도 했다. 이에 델시 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은 “집단 매장 계획은 없다”며 “정부는 법률에 따라 우선 지문과 사진으로 신원을 확인하고, 여기서 확인이 안 될 경우 법치의학적 방식으로 넘어가는 엄격한 절차를 마련해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건물 붕괴 현장에서 구조 작업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지만 거의 마무리된 분위기다. 지난 2일 40대 경비원이 구조된 뒤 이틀 넘게 생존자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국제 구조대도 철수를 시작해 당초 77개 구조팀 가운데 현재는 25개 팀만 현장에 남아있고, 유엔도 구조 대응 주도권을 지난 3일부터 베네수엘라 민방위 당국에 넘겼다.
베네수엘라 당국 공식 집계에 따르면 이번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는 이날 기준 3342명, 부상자는 1만6700명이며, 이재민은 1만7000명 이상으로 나타났다. 민간 운영 실종자 신고 사이트에는 3만명 넘는 이름이 등록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