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읽으면 세계가 보인다/마스다 유리야·이케가미 아키라/한호정 옮김/도서출판 날/1만8000원
지도 위의 국경은 가느다란 선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국경은 역사와 문화, 정치와 경제, 전쟁과 평화가 켜켜이 쌓인 가장 두꺼운 경계다. 국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언어와 종교가 달라지고 생활방식과 경제 수준이 바뀌며, 때로는 같은 민족이 서로 다른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동 분쟁, 인도와 중국의 국경 대치 등 세계 곳곳의 갈등 역시 결국 국경 문제와 맞닿아 있다.
‘국경을 읽으면 세계가 보인다’ 는 국경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계사와 국제정세를 새롭게 읽어내는 교양서다. 국제분쟁과 외교 현장을 오랫동안 취재해 온 저널리스트 마스다 유리야가 세계 각지의 국경을 직접 답사하며 기록했고, 국제정세 해설로 정평이 난 이케가미 아키라가 역사와 국제정치의 맥락을 덧입혀 국경을 단순한 지리적 경계가 아닌 ‘살아 있는 역사 현장’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책의 흥미로운 사례 가운데 하나는 베를린 장벽이다. 많은 사람이 베를린 장벽을 동독과 서독을 가르는 국경으로 알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장벽은 동독 영토 한가운데 위치한 서베를린을 외부와 차단하기 위해 세운 봉쇄시설이었다. 길이 155㎞의 거대한 장벽은 냉전 체제가 만들어낸 가장 상징적인 인공 국경이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장벽 붕괴의 과정이다. 민주화를 이룬 헝가리가 국경을 개방하면서 수많은 동독 주민들이 탈출했고, 이를 막으려는 동독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거대한 민주화 시위로 번졌다. 결국 정부는 출국 규정을 완화하기로 결정했고, 기자회견에서 신참 보도관이 시행 시기를 묻는 질문에 “즉시”라고 잘못 답하면서 수많은 시민들이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당황한 국경수비대는 결국 검문소를 개방했다. 물론 베를린 장벽은 한 사람의 말실수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니다. 동독 체제의 균열과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 소련의 개혁 정책 등 오랜 변화가 누적된 끝에 찾아온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신참 보도관의 말실수는 그 거대한 변화를 현실로 끌어낸 결정적인 촉매가 됐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도 눈길을 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불법 이민을 막겠다며 국경 장벽 건설을 강하게 추진했지만, 미국의 국경 장벽은 이미 2006년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부터 설치되기 시작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기존 장벽을 대폭 보강하고 수백 킬로미터 구간을 새로 건설하며 자국 우선주의를 상징하는 국경 정책을 강화했다. 저자는 취재 과정에서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입국하다 장시간 억류된 경험을 소개하며,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장벽을 넘어야 하는 난민들의 절박함을 체감했다고 고백한다. 자유와 이민의 나라라는 미국의 이미지 이면에는 배제를 위한 물리적 장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나라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부분은 한반도의 군사분계선이다. 일본인 저널리스트의 눈에 비친 한반도는 아직 국경조차 확정되지 않은 전쟁의 현장이다. 남북을 가르는 선은 국경이 아니라 휴전선이며, 지금도 군사적 긴장이 이어지는 공간이다. 저자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취재하며 “무슨 일이 일어나도 여행회사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서약서에 서명하고, 옷에 적힌 영어 문구까지 가려야 하는 엄격한 통제를 경험한다.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장 안에서 군사분계선을 한 걸음 넘자 스마트폰의 GPS가 곧바로 북한으로 표시되는 경험은 보이지 않는 이념의 선이 현실 공간을 얼마나 강력하게 규정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군사분계선은 수십 년 동안 가족과 민족을 갈라놓은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살아 있는 장벽’이다. 평화와 복지국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핀란드를 다룬 부분도 인상적이다. 산타클로스와 무민의 나라라는 이미지와 달리 학교와 공공시설 지하에는 대규모 방공호가 갖춰져 있고, 성인 남성에게는 병역 의무가 부과된다. 이러한 안보 의식은 겨울전쟁 당시 소련의 침공을 막아낸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됐으며, 최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으로 이어진 현실 인식과도 맞닿아 있다. 가장 평화롭게 보이는 나라 역시 치열한 생존의 기억 위에 서 있음을 일깨운다.
국경이 반드시 전쟁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루이지애나와 알래스카를 매입해 영토를 넓혔고,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던 국경 분쟁을 협상을 통해 해결했다. 국경은 총칼만이 아니라 외교와 협상, 경제력으로도 만들어지고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저자는 국경을 단순한 영토의 경계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국가의 운명이 교차하는 역사 현장으로 읽어낸다. 국경을 이해하는 일은 곧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라는 메시지가 책 전반을 관통한다. 지도 위의 선 하나가 어떻게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꾸고 개인의 삶을 갈라놓았는지를 흥미로운 사례와 현장 경험으로 풀어낸 이 책은 독자에게 국경 너머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