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정의로운가, 자비는 누구의 것인가… 정공법으로 돌아온 '베니스의 상인'

셰익스피어 희곡 가운데서도 ‘베니스의 상인’은 단연 문제작이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작품 전체의 색깔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희극적 악인으로 소비되던 샤일록은 19세기에 들어 존엄을 지닌 비극적 인간으로 격상됐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 이후에는 차별이 만들어낸 희생자로 다시 읽혔다. 유대인 공동체가 공식적으로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셰익스피어 시대 영국에서도 반유대적 편견과 상상력은 강하게 작동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오히려 샤일록의 언어를 통해 이러한 정서를 비판적으로 드러냈다는 해석도 제기돼 왔다. 400년 넘게 이어진 논쟁 속에서 샤일록은 지금도 다양한 얼굴로 재창조되고 있다.

 

연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을 열연 중인 배우 박근형.  파크컴퍼니 제공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 계약, 안토니오의 친구 바사니오의 구혼 상자 고르기, 바사니오와 포셔 부부의 반지 소동까지 세 갈래 이야기가 정교하게 얽힌 이 고전이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올랐다. 1200석 대극장에서 연극으로는 드물게 한 달간 공연하는 대장정이다. 주인공 샤일록 역을 맡은 박근형은 작품 발표회에서 “이렇게 큰 극장에서 연극을 공연하기는 상당히 힘들었는데,(한국 연극이)상업극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의미에서 상업극이 나와야 하는데 그 길목의 첫 번째 발걸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공작으로 출연하는 신구 역시 “30일 공연에 3만 명은 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포부를 밝혔다.

 

8일 개막 공연에서 본 이번 ‘베니스의 상인’은 원전의 플롯과 고전적 외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법과 자비가 누구에게 선택적으로 적용되는지를 동시대적 문제로 보여준 작품이다. 각색과 연출을 겸한 오경택은 원작 5막 20장을 2막 19장으로 재구성하면서도 원전의 흐름과 본질을 무대로 옮겼다. 셰익스피어 특유의 언어적 리듬과 재치를 현대 우리말로 생생하게 옮겼다. 왁자지껄한 베니스의 축제를 소환하기 위해 춤과 노래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집중도 높은 시작을 만들었다. 합창으로 여는 도입부와 코믹한 구혼자들의 퍼포먼스가 더해지면서 공연 내내 관객을 사로잡는 재미도 갖추며 대극장 흥행작이 될 자격을 보여준다.

 

살 1파운드의 계약과 구혼 상자의 규칙, 부부의 반지 약속은 모두 인간관계를 규칙과 증표로 보증하려는 시도다. 공연은 이 세 약속이 법적 문언, 아버지의 유언, 부부의 신의라는 서로 다른 이름 아래 얼마나 자의적으로 적용되는지를 보여준다.

 

연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공작 역을 맡은 신구. 파크컴퍼니 제공

무대 또한 절제된 형식미가 돋보인다. 배의 용골을 연상케 하는 첫 장면부터 최소한의 구조물만으로 베니스 거리와 샤일록의 집, 포셔의 저택을 불러낸다. 베니스를 상징하는 나룻배와 높이 솟은 공작의 재판장석이 무대를 압도하는 마지막 법정 장면까지 다양한 볼거리가 무대를 채운다.

 

연출은 특정한 도식에 샤일록을 가두기보다 작품을 둘러싸고 축적돼 온 여러 해석과 가치의 충돌을 한 무대에 겹쳐 놓는다. 샤일록은 일방적인 희생자로 그려지지 않는다. 박해의 상처와 돈만 좇는 수전노의 면모가 한 인물 안에 공존한다. 일부 무대가 시도했던 귀족적 풍모도 걷어냈다. 동화 ‘크리스마스 캐럴’ 속 스크루지가 떠오르는 샤일록이다.

 

단독 주연인 박근형의 샤일록은 그 균형의 중심에 있다. 1959년 중앙대 재학 시절 처음 연기했던 배역을 60여 년 만에 다시 맡은 그는 작품 발표회에서 “20대 때 생각했던 샤일록은 권선징악이었지만, 지금은 그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을 표현하고 싶다”고 밝혔다. 실제 무대 위 샤일록은 돈을 좇는 수전노이면서도 기독교인들의 탄압과 박해에 대한 억울함을 내면 깊이 간직한 인물로 구현된다. 다만 그 양면이 인물 안에서 입체적으로 충돌하기보다 각각의 성격으로 분리돼 평면적으로 머문 점은 아쉽다. 또 다른 고전 ‘고도를 기다리며’ 이후 다시 오랜 동료와 한 무대에 선 신구는 법정을 주재하는 공작 역으로 이 작품이 지닌 특별함에 무게를 실어준다.

 

연극 ‘베니스의 상인’.   파크컴퍼니 제공

대단원의 재판정에 이르면 관객은 누구의 편도 쉽게 들기 힘든 상태에서 작품이 던지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법은 언제나 정의로운가. 자비는 누구에게 허락되는가. 그리고 우리는 결국 누구의 편에 서게 되는가. 연출이 이 작품의 주제로 꼽은 ‘선택적 공정성’에 관한 질문들이다.

 

특히 이번 무대에서는 ‘법대로’라는 말의 맹점이 도드라진다. 살 1파운드를 도려내는 계약의 이행을 둘러싼 공방은 동일한 법문도 누가 해석하고 집행하느냐에 따라 정의의 수단에서 폭력의 도구로 순식간에 뒤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법조문에 묶여 전 재산을 빼앗길 위기에 몰린 샤일록은 재산을 딸에게 상속한다는 공증문서를 쓰고 개종까지 강요당한다. 안토니오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던 가해자는 어느 순간 다수 공동체가 지배하는 사법체계의 희생자로 전환된다.

 

연출은 원작에서 명령과 짧은 응답으로 처리된 샤일록의 강제 개종을 성당에서 신부 주관하에 치르는 처연한 장면으로 확장해 시각화했다. “종교를 바꿔버린다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 자체를 앗아가는 것이기에 그것 또한 정의라고 볼 수 없다”던 연출의 문제의식이 응축된 대목이다. 딸 제시카가 무너진 아버지를 거두는 장면을 더해 관객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준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정작 샤일록의 목소리를 더하지 않는 선을 지킨다.

 

안토니오와 바사니오의 관계 또한 이번 무대의 관전 포인트다. 두 사람의 우정을 둘러싼 해석 논쟁은 셰익스피어 학계의 오랜 화두인데, 연출은 분명한 태도를 취한다. 친구들의 놀림 속에서도 거듭 바사니오를 향한 사랑을 언급하는 안토니오, 그런 안토니오와 포셔가 두어 차례 엇갈리는 장면 등을 통해 두 사람의 특별한 우정을 부각한다. 개막 공연에서 안토니오 역을 맡은 카이는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긍지 높은 베니스 상인이면서도 유대인을 뼛속 깊이 경멸하는 당대의 전형적 인물상을 보여줬다.

 

연극 ‘베니스의 상인’.   파크컴퍼니 제공

바사니오 역의 이상윤과 포셔 역의 원진아는 2시간 20분 공연을 이끄는 주요 동력이다. 크고 작은 연극 무대에서 꾸준히 활약해 온 이상윤은 이번 작품에서 한층 돋보이는 존재감을 발산한다. 원진아는 대극장 연극 무대가 처음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안정된 연기로 포셔의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밖에도 랜슬럿 역의 박명훈과 네리사 역의 한세라는 신스틸러 노릇을 톡톡히 한다. 모로코 왕자 이지수와 아라공 왕자 이종영 등 구혼자 역을 맡은 배우들의 코믹 연기도 극에 재미를 불어넣는다. 투발 역의 이원승이 오랜만에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는 것도 반갑다.

 

결국 샤일록은 재산과 종교를 잃은 그 순간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무대에서 내지 못하고 침묵한 채 무대를 떠난다. 법과 자비의 언어를 누가 독점하는지를 침묵으로 드러낸 무대다.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8월 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