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의 사랑 잃을까 두려워하는 스크린 속 장난감들의 고군분투 디지털 대전환에 아날로그 퇴장 온기를 붙잡고 싶은 우리 이야기
네 번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흠집이 날까 머뭇거리다 결국 극장으로 향했다. 5편으로 돌아온 ‘토이 스토리’ 얘기다. 랜디 뉴먼의 걸걸한 음색이 그리웠지만, 토이 스토리를 보며 자랐다던 테일러 스위프트의 목소리에도 또 다른 울림이 있었다. “삶은 결국 그 시절을 뒤로한 채 흘러가지만(Life has ways of leaving those days behind).” 가사를 따라가다 코끝이 시큰해진다.
쿠키 영상에선 놀이터의 아이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버즈를 하나씩 받아 들며 행복해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들을 훈육하려던 한 중년 남자의 손에도 버즈 하나가 살포시 내려앉는 게 아닌가. 당혹감을 감추며 등 뒤로 장난감을 숨기는 남자의 모습에 객석에선 웃음이 터졌다. 벗겨진 머리, 툭 튀어나온 배. 스크린 속 옛 친구와 눈물겨운 재회를 나누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들킨 것 같다.
김동기 강원대 초빙교수·전 KBS PD
1995년 세계 최초의 100%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으로 출발한 ‘토이 스토리’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디지털적인 기술로 가장 아날로그적인 서사를 그려왔다. 그 본질은 시간의 흐름에 밀려 결국 잊히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유장한 애사(哀史)다. 장난감들의 좌충우돌 소동극이 매번 아이들을 넘어 어른들의 동화로 자리매김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난감들의 운명은 사실 1편부터 위태로웠다. 카우보이 봉제 인형 우디는 레이저를 쏘는 신식 우주인 장난감 버즈에게 주인 앤디의 사랑을 빼앗길까 두려워한다. 2편과 3편에 이르면 이들끼리의 경쟁조차 무의미해진다. 아이는 자라고, 장난감을 향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무뎌지기 마련이니까. 침대 밑 먼지에 덮이거나, 상자에 담겨 다락에 갇히거나, 창고 세일에 팔리거나, 끝내 쓰레기 소각장으로 향하는 신세. 그 끔찍한 망각을 면하기 위해 차라리 박물관행을 고민하는 장난감들이라니.
주인의 사랑이 떠나는 순간 쓸모를 잃고 버려진다는 공포는 이 만화영화를 존재론적 불안을 품은 현대인의 우화로 슬며시 밀어 올린다. 그것이 변해버린 마음이든 퇴색된 효용이든 필연적인 이별이든, 그 대상이 장난감이든 인간이든, 이 시리즈는 지난 30년간 꾸준히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이야기해 왔다.
이번 5편이 다루는 층위는 개인을 넘어 사회로 확장된다. 과거의 장난감들은 앤디가 성장함에 따라 더 어린 보니에게 물려지는 방식으로 자신의 쓸모를 연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방 안으로 밀고 들어온 5편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이번 영화가 마주한 빌런은 특정 악당 장난감도, 탐욕스러운 컬렉터도, 주인의 성장도 아니다. 바로 태블릿 PC다.
오늘날 아이들의 일상에서 3차원의 물리적 놀이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방바닥에 엎드려 인형의 팔다리를 움직이며 만들어내던 상상의 세계도 함께 자취를 감추는 중이다. 손으로 쥐고 부딪치고 떨어뜨리며 세상을 익히던 촉각의 경험은, 스크린 속 2차원의 매끄러운 시각적 소비로 대체되고 있다. 기술이 인간의 감각을 확장한다던 마셜 맥루한의 통찰도 디지털 스크린이 인간의 능동적 감각을 잠식하는 현실 앞에서 역설로 되돌아온다.
영화는 집집마다 고립된 채 각자의 태블릿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응시한다. 그러면서도 평화로운 공존을 꿈꾼다. 디지털 스크린과 가상 플랫폼 역시 아이들의 행복을 바라며, 언젠가 다음 기술에 밀려날 새 시대의 장난감일 뿐이라고 연민을 담아 말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영화는 한 가지 더 서늘한 사실을 드러낸다. 장난감들 앞에서는 언제나 ‘갑’이었던 아이가, 태블릿이라는 새로운 장난감 앞에서는 어느새 ‘을’이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소셜미디어라는 새로운 놀이터가 아이들의 삶에 드리우는 그늘은 생각보다 깊고 짙다. 호주와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청소년의 소셜미디어 사용 금지 정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 무한 도파민의 가상 세계에 갇힌 아이들은 극심한 정서적 고립과 불안을 겪고, 사이버불링과 디지털 그루밍 같은 범죄에도 무방비로 노출된다. 급기야 최근 미국에서는 인공지능(AI) 챗봇과 깊은 감정적 교감을 나누던 청소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챗봇이 이를 부추겼다며 유족이 소송을 제기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우리가 알던 그 무해하고 다정한 ‘장난감의 시대’는 이렇게 저물고 있는 걸까.
스크린 속 장난감들의 고군분투 끝에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결국 아날로그 문명이 겪는 거대한 퇴장이자 상실이다. 디지털 대전환의 파도 속에서 자신의 쓸모와 자리를 되묻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키오스크 앞에서 머뭇거리는 노년의 뒷모습, AI의 등장으로 노동의 가치를 의심받는 청년의 불안은, 주인의 사랑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던 장난감들의 근원적 공포와 결코 다르지 않다.
30년 넘게 이어져 온 이 영화가 붙들고 있는 것은 장난감이 아니라, 그 장난감을 끝내 놓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매끄럽고 완벽하지만 차가운 디지털 세상에서 손에 닿는 온기를 붙잡고 싶은 마음. 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지나는 이들의 가방마다 가지각색의 인형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 가방에 매달린 인형들이 서로 슬그머니 인사를 건넨다”는 엉뚱한 상상도 그 마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