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콘텐츠 산업은 이제 문화예술의 영역을 넘어 국가 경제와 국가브랜드를 견인하는 핵심 전략산업으로 성장했다. K-팝, 영화, 드라마, 웹툰, 게임은 세계 시장에서 한국의 경쟁력을 입증하며 새로운 수출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AI가 산업 전반의 생산방식과 가치창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는 지금, 콘텐츠 산업 역시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을 요구받고 있다. 앞으로의 경쟁력은 더 많은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콘텐츠 IP를 지속적으로 성장시키고, 이를 다양한 산업과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하는 국가 혁신생태계를 얼마나 잘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
최근 AI 정책을 둘러싼 국제 논의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AI 경쟁력은 기술 자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AI가 실제 산업의 생산성 향상과 새로운 가치창출로 이어지려면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조직 혁신, 데이터, 인재, 제도, 투자, 시장이 함께 변화해야 한다. 이는 콘텐츠 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AI 제작 도구를 보급하는 것만으로는 경쟁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콘텐츠 기업의 성장, IP의 확장, 데이터 축적, 정책금융, 글로벌 유통을 연결하는 산업 인프라가 함께 구축될 때 비로소 AI는 콘텐츠 산업의 실질적 성장동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콘텐츠 IP는 단순한 저작권이 아니다. 작품, 스토리, 세계관, 캐릭터, 음악, 디자인 등 콘텐츠를 구성하는 원천 요소가 결합된 복합적 지식재산이다. 하나의 IP는 영화, 드라마, 게임, 애니메이션, 캐릭터, 굿즈, 공연, 관광, AI 서비스, 디지털 플랫폼으로 끊임없이 확장될 수 있는 가치사슬의 출발점이다. 나아가 지역의 축제, 관광, 문화도시, 로컬 브랜드, 플레이스 메이킹과 결합할 때 콘텐츠 IP는 플랫폼을 넘어 생활권 시장으로 확장될 수 있다. 결국 콘텐츠 산업의 경쟁력은 개별 작품의 일회성 흥행이 아니라, IP가 여러 산업과 생활권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며 지속적인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한국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인정받는 콘텐츠 창작 역량을 갖추고 있다. 오징어 게임, 무빙, 기생충은 한국 콘텐츠의 창의성과 글로벌 확산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이 장기적인 IP 비즈니스로 이어지는 구조는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 일본의 포켓몬, 원피스, 헬로키티는 하나의 IP가 수십 년 동안 게임, 애니메이션, 영화, 완구, 관광, 테마파크로 확장되며 지속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해 온 사례다. 이에 비해 한국은 뛰어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역량은 강하지만, 이를 라이선싱과 연관 산업, 글로벌 플랫폼, 지역 관광, 소비재 산업으로 확장해 장기적으로 성장시키는 산업 체계는 아직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
따라서 콘텐츠 정책도 제작 지원 중심에서 IP 가치사슬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앞으로는 장르별 제작 지원을 넘어, 기획 단계부터 하나의 IP가 드라마, 게임, 애니메이션, 캐릭터, 굿즈, 관광, AI 서비스, 글로벌 플랫폼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 정책의 목표 역시 좋은 콘텐츠를 많이 만드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좋은 IP가 다양한 산업을 연결하고, 지속적인 시장과 일자리를 창출하며, 글로벌 가치사슬 속에서 성장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전환은 AI 시대 국가혁신정책의 핵심 과제와도 맞닿아 있다. 기술은 스스로 산업의 방향을 결정하지 않는다. 국가가 어떤 제도와 투자, 정책으로 기술의 활용 경로를 설계하느냐가 중요하다. 기존 경로의존성에 맡길 것인지, 정부가 전략적으로 새로운 성장 경로를 설계할 것인지는 결국 정책의 선택이다. 콘텐츠 산업 역시 AI를 단순한 제작 자동화 도구로 쓸 것인지, 창작자의 역량을 증강하고 IP의 확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활용할 것인지가 국가 정책의 방향에 달려 있다. 따라서 정부의 역할은 단순한 규제자나 보조금 집행자를 넘어, 산업의 새로운 가치사슬을 설계하는 시장 형성자(market shaper)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 인프라가 개념검증(PoC)이다. 콘텐츠 분야의 PoC는 단순한 시제품 제작이나 파일럿 테스트를 넘어선다. 콘텐츠와 IP가 실제 시장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어떤 팬덤을 형성하며, 유통 계약과 투자, 해외 진출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데이터로 검증하는 과정이다. 기술이 실험실에서 검증된다면, 콘텐츠는 시장에서 검증된다. 여기서 시장은 온라인 플랫폼이나 유통 계약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콘텐츠 IP가 축제, 관광, 로컬 브랜드, 시민참여와 결합하는 생활권 현장도 중요한 시장이다. 지역문화도시는 방문, 소비, 체류, 재방문, 시민참여 데이터를 축적하고 콘텐츠 IP의 확장 가능성을 검증할 수 있는 대표적 PoC 현장이다. 이렇게 축적된 시장 실증 데이터는 콘텐츠 정책의 핵심 자산이 된다. 어떤 장르가 성장하는지, 어떤 IP가 글로벌 확장성을 갖는지, 어떤 기업이 후속 투자와 해외 진출에 성공하는지를 지속적으로 축적하고 분석해야 한다.
PoC는 콘텐츠 산업의 시장 실증 제도이자 정책 혁신 시스템이다. 정부는 PoC를 통해 콘텐츠 기업과 IP의 성장 데이터를 축적하고, 산업계는 이를 바탕으로 사업 전략을 고도화하며, 투자자는 보다 객관적인 투자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연구기관은 축적된 데이터를 분석해 정책 효과를 평가하고, 정부는 이를 다시 제도 개선과 정책금융 설계로 연결한다. 이처럼 PoC는 콘텐츠 정책을 경험과 직관 중심에서 데이터와 학습 중심으로 전환시키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PoC를 통해 축적된 데이터는 콘텐츠 가치평가의 역할도 새롭게 정의한다. 지금까지의 가치평가는 프로젝트의 경제성을 판단해 정책금융과 연결하는 기능에 머물러 왔다. 앞으로는 시장 실증 데이터를 결합해 기업의 성장성, IP의 확장성, 글로벌 유통 역량, 후속 투자 여건까지 함께 진단하는 체계로 발전해야 한다. 가치평가는 지원 여부를 가르는 행정 절차가 아니라, 정책·금융·투자·글로벌 시장을 연결하는 신뢰 인프라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보증, 융자, 펀드, 민간투자, 글로벌 투자 판단에 두루 활용될 수 있는 인지적 공동체와 근거 기반의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산업계, 민간, 대학, 연구기관, 투자기관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협력하는 새로운 혁신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기업이 시장 데이터를 축적하고, 산업협회 등 민간기관이 이를 수집·체계화하여 PoC 운영, 투자자 연결,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 등 현장 운영을 주도해야 한다. 연구기관은 축적된 데이터를 분석해 산업 변화를 예측하며, 정부는 이를 정책으로 연결하고, 금융기관은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과 IP에 자본을 공급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정부가 제도와 재원을 설계하고, 민간이 현장을 이끄는 협력 구조가 뒷받침될 때 혁신 거버넌스는 비로소 실효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데이터 인프라가 비식별화, 표준화, 권한관리 등 적절한 거버넌스 원칙 위에 구축된다면, 콘텐츠 정책은 개별 사업을 지원하는 수준을 넘어 산업 전체를 학습하고 진화시키는 운영체계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국내에서만 완성될 수 없다. 최근 영국, 에스토니아, 핀란드 등 유럽 주요국의 창조산업 혁신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핵심 기관들과 협의한 결과, 하나의 공통된 흐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국의 Creative PEC, Creative UK, CoSTAR, UKRI(UK Research and Innovation), University of Bristol 등의 사례에서 보듯, 창조산업의 경쟁력은 개별 프로젝트의 성과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책연구, 창조산업 R&D 인프라, 연구혁신 투자, 대학의 지식기반, 민간 투자와 지역 실증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창조산업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혁신 생태계로 발전한다.
에스토니아 탈린은 도시 전체를 공공 테스트베드로 운영하며 스타트업의 실증 성과를 공공조달과 후속 투자로 연결하고 있고, 핀란드 헬싱키는 XR·AI 전문 인큐베이터를 통해 글로벌 기업의 현지 실증과 시장 진입을 지원하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한 것은, 정부가 제도와 재원의 기반을 제공하되 현장의 운영은 산업협회와 민관 합작 조직 등 민간이 주도하는 구조가 이미 정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는 국내 민관협력을 넘어 이러한 선도국들과의 공동 연구, 공동 실증, 데이터 프레임워크 공유를 통해 글로벌 수준의 정책 협력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나아가 OECD, UNESCO, WIPO 등 국제기구와 연계해 데이터 표준, 문화다양성, IP 거버넌스를 포괄하는 정책 프레임워크를 구축하고, 창조산업의 성과를 국제적으로 비교·검증할 수 있는 공통의 증거 기반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결국 AI 시대의 경쟁은 기술 경쟁이 아니라 혁신 패권과 레짐의 경쟁이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다고 국가 경쟁력이 저절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데이터를 축적하고, IP를 확장하며, 투자와 정책을 연결하고,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는 능력이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
대한민국 콘텐츠 산업도 이제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국가'에서 '좋은 IP를 지속적으로 성장시키는 국가'로 도약해야 한다. 창작지원에서 IP 설계와 사업화로, 제작 중심에서 IP 가치사슬 중심으로, 개별 지원사업에서 데이터 기반 운영체계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좋은 IP가 다양한 콘텐츠로 확장되고, 지역의 축제·관광·로컬 브랜드와 결합하며, 패션·뷰티·푸드·디지털 서비스와 글로벌 시장으로 이어지는 K-컬처 생태계를 구축할 때, 대한민국은 콘텐츠 강국을 넘어 AI 시대 창조경제를 선도하는 국가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이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