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가.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이 정말 현실일까. 와이너리 앞에 선 사내 얼굴에는 절망감이 가득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벽돌 한 장 한 장 정성껏 쌓아 올리고 담쟁이덩굴까지 심은 건물이 화마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폐허를 바라보던 그는 그러나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포도밭은 살아있었기에. 다시 일어서자. 굳게 다짐한 그는 불굴의 의지로 산을 파고 콘크리트, 강철, 유리로 건물을 다시 세웁니다. 그렇게 재탄생한 나파밸리 시뇨렐로 에스테이트(Signorello Estate) 건물은 이제 아무리 거센 불길도 닥쳐도 끄덕없습니다. 기후변화와 자연재해라는 거대한 파도를 마주한 와인 생산자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난관을 헤쳐가는 미국 최대 와인산지 캘리포니아의 광활한 포도밭에 섰습니다.
◆대형 산불도 버티는 철옹성 구축
캘리포니아와인협회는 최근 전세계 와인전문기자들을 상대로 주요 와인산지를 둘러보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단순한 와이너리 투어에 그치지 않고 ‘회복력을 갖춘 미래(Resilient Future)’를 주제로 와인 생산자들이 기후변화의 거대한 파도를 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장을 시리즈로 소개합니다.
캘리포니아는 흔히 ‘축복받은 땅’ 혹은 ‘신의 과일 바구니’로 불립니다. 미국 전체 과일 및 견과류 생산량의 75% 이상을 책임질 정도로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 2%뿐인 지중해성 기후는 건조한 여름과 온화한 겨울을 선사하며 강렬한 일조량 덕분에 과일 당도가 극대화돼 상품성이 아주 뛰어납니다. 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 보르도는 매년 기후가 들쭉날쭉하지만 캘리포니아 주요 와인 산지는 빈티지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일관된 기후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는 점점 옛말이 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가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사례가 매년 반복되는 산불입니다. 2020년 9월 글라스 산불이 나파 카운티와 서노마 카운티 일대 약 6만7484에이커를 태워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은 무려 37억달러(약 5조5000억원)의 피해를 당했습니다. 유서 깊은 와이너리 건물이 전소됐고 여러 와이너리는 연기 오염을 우려해 와인 생산 자체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산불 연기에 노출된 포도는 불쾌한 젖은 재, 탄 고무 냄새가 나면서 와인 고유의 과실 향을 완전히 덮어 버리고 맙니다.
캘리포니아 산불은 기후변화가 만든 구조적 문제입니다. 지구온난화로 대기가 식물과 토양의 수분을 빨아들여 바짝 마른 ‘불쏘시개’ 상태로 바꾸면서 대형 산불로 번지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따라서 와인 생산자 입장에선 매년 끊임없이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산불이 요즘 가장 큰 위협입니다. 1977년 레이 시뇨렐로 시니어가 나파밸리 실버라도 트레일에 설립한 가족 경영 와이너리 시뇨렐로 에스테이트가 대표적입니다. 와이너리로 들어서자 건물 앞 거대한 인공 연못과 돌투성이 주변 땅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산불에 대비한 1차 방어막입니다. “2017년 10월8일 밤 아틀라스 산불이 나파밸리 언덕을 집어삼켰을 때 목조 와이너리가 몇 시간 만에 잿더미로 변했어요. 제가 평생 모은 전 세계의 값비싼 와인 2000여병도 함께 사라졌답니다.”
이 정도면 모든 것을 포기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는 6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2024년 어떤 화재도 접근할 수 없는 ‘철옹성’을 구축했습니다. 핵심은 지상 노출을 최소화한 독특한 설계입니다. 산허리를 깊게 파고들어 약 743㎡ 규모의 와이너리 건물을 요새처럼 숨기고 약 1022㎡ 규모의 동굴 셀러도 만들었습니다. 특히 외부 불길이 덮쳐도 산을 타고 넘어가도록 지붕을 스키 점프대처럼 설계했습니다. 노출되는 입구는 콘크리트, 강철, 유리 등 불에 타지 않는 소재로만 마감했습니다. 또 모든 전력선은 땅속에 매설했고 태양광 발전과 백업 발전기로 외부 전력망 없이도 가동이 가능한 전력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지하수 관정 2곳과 화재 진압용 펌프가 연결된 약 38만ℓ 규모 전용 저수조도 마련했습니다. 온도 조절과 공조 장치를 갖춘 완전 방재 동굴 셀러는 나파밸리에서 시뇨렐로가 최초입니다. 레이 주니어가 전 세계에서 새로 모은 약 2000병의 와인 컬렉션은 현재 이곳에 보관돼 있습니다. 단단한 콘크리트 벽으로 무장한 동굴 셀러를 따라가자 엄청난 양의 오크통에서 와인이 맛있게 익어 가는 향이 번집니다. 셀러 끝의 노출된 암반 벽면은 이곳이 산을 파고 만든 셀러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시뇨렐로 파드론(Padrone)
이탈리아어로 주인, 대부를 뜻하며 창립자인 아버지 레이 시뇨렐로 시니어를 기리기 위해 탄생한 와인입니다. 에스테이트 포도밭 가운데서도 가장 척박하고 바위가 많은 언덕 블록에서 수확한 포도만을 사용합니다. 뿌리가 깊이 파고들어야 겨우 생존하는 땅에서 자란 나무일수록 열매의 밀도와 개성이 응축되기 마련입니다. 매년 철저한 수량 제한과 엄격한 선별을 거쳐 극소량만 생산됩니다.
코를 대면 카시스, 블랙베리 잼, 검은 체리 등 잘 익은 검은 과실 향이 강렬하게 터져 나옵니다. 여기에 야생 세이지, 민트 같은 신선한 허브 향과 흑연, 연필 깎은 가루의 뉘앙스가 더해져 세련된 결을 만듭니다. 시간이 흐르면 에스프레소와 다크 초콜릿 카카오 닙스, 고급 시가 상자의 풍미에 보랏빛 제비꽃의 화려한 꽃향기까지 피어오르며 완벽한 레이어를 이룹니다. 입에 머금으면 풀 바디의 웅장한 볼륨과 파워가 느껴지지만 결코 무겁거나 둔탁하지 않습니다. 단단하고 힘 있는 타닌은 긴 오크 숙성을 거치며 벨벳처럼 매끄럽고 둥글게 다듬어져 입안 전체를 부드럽게 감쌉니다. 나파밸리의 뜨거운 태양이 키워낸 풍성한 과실 풍미 속에서도 정교하고 활기찬 산도가 중심을 꽉 잡아주어 균형감과 생동감을 잘 유지합니다. 마신 뒤에는 짭조름한 풍미와 흙 내음, 은은한 미네랄리티가 에스프레소 향과 함께 길게 이어지고, 분말 같은 미세한 타닌의 감촉이 여운을 남깁니다.
최근 빈티지들은 전설적인 와인메이커 셀리아 웰치(Celia Welch)의 지휘 아래 과거의 과도한 추출 방식에서 벗어나 포도 고유의 우아함과 테루아를 극대화하는 스타일로 진화했습니다.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품종으로 카베르네 프랑, 멜롯, 말벡을 정교하게 블렌딩해 보르도 특급 와인에 버금가는 구조감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세계적인 평론지 젭 던럭(Jeb Dunnuck) 98점, 디켄터(Decanter)가 97점을 받은 최근 빈티지들은 지금 마셔도 훌륭하지만, 20년에서 30년 이상 장기 숙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파밸리 특유의 강인한 파워와 정교한 우아함을 동시에 경험하고 싶은 컬렉터라면 눈여겨볼 만한 와인입니다.
▶시뇨렐로 시뇨리(Signori)
카베르네 소비뇽이 주품종이며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 말벡을 블렌딩합니다. 블랙베리와 카시스, 맑은 체리 잼의 검붉은 과실 향이 먼저 다가오고, 이어 말린 꽃잎과 세이지, 민트, 베르가모트, 찻잎 같은 다채로운 허브 뉘앙스가 코끝을 스치며 싱그러움을 더합니다. 입에 머금으면 다크 초콜릿과 모카, 에스프레소, 가죽, 흑연의 묵직하고 고급스러운 오크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웁니다. 쾌활한 산도가 중심을 잡아주어 미디엄-풀 바디의 구조감을 매끄럽게 이끌고, 타닌의 질감 역시 모나지 않고 실크나 벨벳처럼 촘촘하고 부드럽게 목을 넘어갑니다. 여운에서는 정갈하게 구운 정향(Cloves)과 쌉싸름한 담배 잎, 훈연한 세이지 향이 침샘을 자극하는 짭조름한 미네랄리티와 함께 아주 오랫동안 이어집니다.
이탈리아어로 ‘신사(Gentlemen)’를 뜻하는 시뇨리(Signori)는 와이너리를 공동 창립한 레이 시뇨렐로 시니어와 주니어 부자, 그리고 와이너리를 품격 있게 이끌어 온 모든 이들을 기리는 이름입니다. 최고가 플래그십 파드론에 필적하는 품질을 지녔으면서도, 전혀 다른 테루아의 매력을 영리하게 녹여낸 와인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파드론이 가장 척박하고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언덕 꼭대기 블록에서 태어난다면, 시뇨리는 와이너리 부지 동쪽을 향한 경사면의 포도를 기반으로 합니다. 뜨거운 오후의 서쪽 태양을 피하고 시원한 아침 햇살만 받는 이 자리는,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 특유의 묵직한 파워보다는 정교한 산도와 신선한 허브 향, 매끄러운 밸런스를 얻어내는 명당입니다.
▶시뇨렐로 홉스 뀌베 샤르도네(Hope's Cuvée Chardonnay)
시뇨렐로가 와이너리를 설립한 것은 1977년이지만 초창기에는 포도를 케이크브레드(Cakebread), 케이머스(Caymus) 등 나파밸리의 유명 와이너리들에 전량 판매했습니다. 그러다 1985년 포도 수확량이 예상보다 너무 많아 처분이 곤란해지자, 시뇨렐로 가문은 이 포도를 다른 곳에 파는 대신 직접 와인으로 양조해 보기로 결정합니다. 자체 양조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인근 시설을 빌려 최초로 ‘Signorello Estate’라는 레이블을 붙인 샤도네이 와인 2500케이스를 생산합니다. 이 와인이 시뇨렐로의 공식 첫 빈티지(1985년)입니다. 하지만 시뇨렐로 가문의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 홉스 시뇨렐로는 첫 와인이 생산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홉스 뀌베 샤르도네는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1988년부터 생산된 와인으로 브랜드보다 먼저 태어난, 시뇨렐로 에스테이트의 뿌리와도 같은 와인입니다.
꿀을 두른 듯한 백도와 잘 익은 살구, 스파이시한 배 파이와 구운 사과의 농익은 과실향이 먼저 다가오고, 이어 인동덩굴과 오렌지 블로썸의 화사한 꽃향기가 피어오릅니다. 여기에 숙성이 빚어낸 버터스카치, 구운 아몬드, 바닐라 빈의 고소한 뉘앙스가 오크와 매끄럽게 어우러지며 복합미를 더합니다. 무엇보다 입안 가득 퍼지는 부드럽고 실키한 질감이 돋보입니다. 1980년에 심어진 시뇨렐로의 가장 오랜 수령의 포도가 남다른 밀도와 풍부함을 불어넣습니다. 효모 앙금과 숙성시키는 쉬르 리(Sur lie)에 더해 매주 한 번씩 앙금을 저어주는 바토나주(Bâtonnage)를 거치며 크리미하고 버터리한 풍미를 극대화했습니다. 하지만 젖산발효를 50% 선에서 멈춰 세워 균형을 잃지 않는 날카로운 산도를 지켜냈습니다. 피니시에서는 입안을 씻어내리는 상쾌한 미네랄리티와 은은한 분필 같은 질감, 바닐라 풍미가 겹겹이 남으며 여운이 길게 이어집니다.
와인앤수지애스트는 95점, 젭 던럭(Jeb Dunnuck)은 93점을 부여했으며, 빈티지마다 “퓔리니 몽라셰(Puligny-Montrachet)를 떠올리게 하는 복합미”라는 찬사가 이어집니다. 연간 생산량이 단 몇천 병에 불과할 정도로 희소해 컬렉터들의 표적이 되는 와인이기도 합니다. 정교하게 짜인 산도와 구조감 덕분에 화이트 와인임에도 수년 이상 아름답게 진화할 수 있는 장기 숙성 잠재력을 갖춘 것도 매력입니다. <기후변화에 맞서는 캘리포니아 와인 산지를 가다②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