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7월 31일. 서울과 평양에 모두 대사관을 둔 몽골은 우리 정부가 북한 내부 동향을 파악하는 주요 외교 채널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김교식 주몽골 한국대사는 휴가차 울란바타르에 머물던 샤라빈 궁가도르지 주북한 몽골대사를 만나 북한 내부 사정을 전해 들었다.
17일 세계일보가 입수한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 ‘주북 몽골대사 접촉보고’에 따르면, 당시 궁가도르지 대사는 북한의 사회 분위기와 식량난, 외교활동 제약 등 평양 내부 사정을 김교식 당시 주몽골 한국대사에게 상세히 전했다. 궁가도르지 대사는 “평양에 부임한 2년 전보다 북한 사회가 한층 경직됐다”고 평가했다.
궁가도르지 대사는 북한의 식량 사정이 “어느 때보다 어렵다”고 평가했다. 평양 주재 외국 공관들이 식량난에 대응하기 위해 공관 구내에서 채소 등을 직접 재배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전부터 현지 외교단이 북한의 심각한 식량난을 체감하고 있었던 셈이다. 다만 궁가도르지 대사는 북·미 대화가 이어지면서 한반도 긴장이 이전보다 다소 완화됐다고 평가했다.
궁가도르지 대사의 자녀 교육 문제에서도 남북한 사이에 놓인 몽골의 독특한 위치가 드러난다. 당시 궁가도르지 대사의 딸은 김일성종합대학 2학년에 재학하며 조선어(한국어)와 영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궁가도르지 대사는 딸을 한국 대학에 유학 보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방학을 맞아 몽골로 돌아온 딸은 한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통역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 정부는 이 사실이 북한 당국에 알려질 경우 궁가도르지 대사의 평양 근무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유학 관련 서류를 받아 한국국제교류재단 등을 통한 장학 지원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북한과 오랜 우호관계를 유지해온 몽골의 고위급이 자녀의 유학지로 한국을 고려했다는 점은 냉전 이후 몽골의 외교 노선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주북 몽골대사 “판문점서 주한대사 만나고 싶다”
특히 궁가도르지 대사는 판문점에서 주한 몽골대사를 만나 현안을 협의하고 싶다는 뜻도 밝혔다. 하지만 북한 당국의 엄격한 이동 제한 때문에 판문점 방문이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몽골은 소련에 이어 두 번째로 북한과 수교한 나라로, 북한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이후 민주화와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 뒤 1990년 3월26일 한국과도 수교하면서 한반도 양측과 모두 외교 협력 기반을 갖추게 됐다. 현재도 서울과 평양에는 각각 수흐볼드 수흐 주한 몽골대사와 에르덴다바 주북 몽골대사가 근무하고 있다.
1993년 작성된 또 다른 외교문서에는 몽골 국가안보회의(NSC)가 한국 NSC와 협력 채널을 구축하려 한 정황도 담겼다. 당시 몽골 NSC 사무총장은 우리 정부 NSC에 관한 자료를 요청하는 한편, “긴밀한 연락 및 협력 유지”를 위해 담당자의 직함과 이름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우리 외무부는 관련 자료를 모아 몽골 측에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우리 정부도 최근 몽골의 대북 소통 역할에 잇달아 기대를 나타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달 몽골을 국빈 방문해 오흐나 후렐수흐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 평화와 남북 대화 재개를 위한 몽골의 역할을 논의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도 지난달 제11차 울란바타르 동북아 안보대화 참석을 계기로 몽골 지도부에 북한의 대화 복귀를 위한 협조를 요청했다. 정부가 몽골이 오랜 기간 축적해온 대북 소통 경험에 다시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몽골이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북한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어렵다. 특히 북한이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고 대화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단기간에 가시적인 중재 성과를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1993년 외교문서는 몽골이 당시 우리 정부에 평양 소식을 전하는 한편, 남북한 사이의 외교적 접점을 모색했음을 보여준다.
최근 우리 정부가 몽골의 역할에 다시 기대를 걸고 있는 만큼, 서울과 평양에 모두 대사관을 둔 몽골이 제한적이나마 대북 소통 창구 역할을 다시 수행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